- '미美를 보는 눈'을 우리는 '안목眼目'이라고 한다. (12)
-
예술을 보는 안목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안목은 깊어야 하고, 현실정치·경제·사회를 보는 안목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안목은 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굴지의 안목들이 버티고 있어야 역사가 올바로 잡히고, 정치가 원만히 돌아가고, 경제가 잘 굴러가고, 문화와 예술이 꽃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19)
-
건축의 중요한 요소를 순서대로 꼽자면 첫째는 자리앉음새location, 둘째는 능에 맞는 규모scale, 셋째는 모양새design이다. 그런데 건축을 보면서 규모와 모양새만 생각하고 이보다 더 중요한 자리앉음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물building만 보고 건축architecture은 보지 않은 셈이다. (22)
-
건축에서 자연과의 어울림이란 말은 얼핏 들으면 겸손하라는 뜻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겸손하지만 비굴해서는 안 되고, 당당하지만 거만해서는 안 된다는 인생의 가르침은 건축에도 그대로 통한다. (23)
-
작신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作新宮室 儉而不随 華而不傍 '새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상 이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고 조선 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이 아름다운 미학은 궁궐 건축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으며,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 발전시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간직해야 할 소중한 한국인의 미학이다. (28)
-
추사는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 시와 문장, 고증학과 금석학, 차와 불교학 등 모든 분야에서 높은 경지를 신묘하게 깨달은 르네상스적 학예인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엔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82)
더보기...
-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나는 이 책에서 위창을 한국서화사를 최초로 집대성한 분이자 서화감정에서 부동의 권위를 갖고 있는 대안목으로서 기리지만, 역사 인물로서 위창은 여기에 머무는 분이 아니다. (92)
-
박병래 선생은 미술품을 모으면서 이것을 돈으로 바꾼다거나 재산을 이룬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고, 한번 산 물건을 내다판 적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사랑채 바깥마당에 몇 길이 넘는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모래를 깔고 도자기를 가지런히 놓은 뒤, 다시 모래 한 겹을 덮고 맨 위는 간장독 김칫독으로 위장하고 떠났다. 공군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돌아와서 보니 독 속은 말끔히 비어 있었지만 도자기는 하나도 다친 게 없었다고 한다. (162)
-
본래 미술품 수집은 미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미술품 수장가들의 공통된 특징을 보면 미술에 대한 사랑이 취미를 넘어 벽癖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거의 미치는 것이다. 좋은것을 보면 안 사고 못 배긴다. 재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분수에 넘치는 것을 곧잘 넘보곤 한다. 그래서 골동에 빠지면 집안이 거덜 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에서 무엇을 이룬 사람은 다 거기에 미친 사람들이다. 미치지 않고는 남다른 무엇을 이루기 힘든 법이니 그 벽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과 결과에 있다. (169)
-
소전 손재형이 이렇게 추사의 〈세한도〉를 전란 속에 찾아온 것은 문화사에 영원히 남을 공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후지쓰카 치카시의 학문적 열정과 고마움이다. 후지쓰카의 연구로 추사는 비로소 조선의 명필을 넘어 동양의 명필로 드높여졌다. (183)
-
간송의 삶을 생각하면 나는 위창 오세창과 백범 김구 두 분이 생각난다. 먼저 위창이 문화보국文化保國을 위하여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우리 서화를 수집하고 연구한 것과 똑같이 간송 역시 문화보국을 위하여 전 재산을 바친 것이다. 그리고 문화보국의 뜻을 새기자면 백범이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에서 피력한 문화보국의 뜻이 절절하게 떠오른다. (193)
-
변월룡은 끝까지 고려인이기를 원하여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았다. 이런 변월룡이건만 남에는 적성국가 소련의 화가여서 알려지지 못했고, 북에서는 영구 귀화를 거부했다고 그의 이름이 이내 지워졌다. 이렇게 우리가 잊고 있던 변월룡을 다시 찾아낸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컬처그라퍼, 2012이란 책을 집필한 미술평론가 문영대 씨였고, 이번 전시는 그가 20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나는 미술평론가 후배 중에 이런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207)
-
그렇게 지지리도 복 없는 '개떡같은' 세월을 살았지만 이중섭은 자신이 겪은 개인적 고통과 외로움을 그림으로 그리며 예술로 승화시켰다. 캔버스가 없으면 골판지에, 담뱃갑 은박지에, 바다 건너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의 여백에 자신의 마음을 때로는 곧이곧대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그렸다.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대상을 통한 작가 마음의 표현이었다. (212)
-
박수근의 작품에는 형상의 영원한 고착이 있다. 마치 바위 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연상케 한다. 마애불이로되 새겨진 곳은 바위가 아니라 캔버스였고, 새긴 것은 부처가 아니라 그가 살던 시대의 죄 없고 정직하고 순진하고 따뜻한 마음의 서민이었다. 없이 살면서도 인간성과 인간미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시대의 가치를 그린 것이다. 그리하여 박수근은 겸재, 단원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우리 미술사의 인물로 남게 되었다. (228)
-
평론가 성완경의 지적대로 오윤의 예술에는 1980년대 민중미술이라는 틀 안에만 가둘 수 없는 더 높은 예술적 성취가 있다. 하지만 오윤 앞에는 그래도 '민중미술'이라는 매김말을 붙여야 오윤답다. 혹자는 오윤을 박수근의 뒤를 잇는 서민 예술가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윤은 박수근처럼 세상을 그저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234)
-
김환기의 예술은 이제 20세기 한국미술의 고전이 되었음이 그렇게 확인되고 있다. 김환기 예술에 대한 이러한 높은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여 우리 근대미술을 세련시킨 점이고, 또 하나는 추상표현주의를 자기화 내지 토착화함으로써 우리 현대미술을 세계 미술의 지평에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258)
-
모든 명화는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275)
안목/유홍준/눌와 20170131 320쪽 20,000원
하루아침에 눈이 번쩍 떠지며 안목이 손톱만큼이라도 늘어날 리 없겠지만, 몰랐다는 핑계를 대며 염치없게 넘길 수 없는 이름이 많다. 머리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