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99년, 로제타석이 발견된 이 해에 이집트는 무덥고 가난한 오지였다. 괜찮다. 서방을 매료시킨 것은 '고대' 이집트였다. 그리고 이곳은 결코 그 매력을 잃지 않았다. (11)
- 그 경외감은 성체자聖體字, hieroglyphs로 이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인상적인 쓰기 체계다. 로제타석의 비밀이 풀리기 이전의 그 오랜 시간동안 이 문자의 수수께끼는 모든 이집트 방문자의 면전에 고개를 내밀었다. 이집트의 유적들과 무덤들은 매혹적이고 화가 치밀도록 정교한 그림문자로 뒤덮여 있었지만(한 초기 탐험자의 말을 빌리자면 "끝없는 성체자") 그 해독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15)
- 로제타석. 맨 위가 성체자이고, 중간이 속체자(성체자의 일종의 간체자)이며, 아랫부분이 고대 그리스 문자다. 학자들은 그리스 문자를 읽을 수 있었지만, 다른 두 문자는 해독할 수 없었다. (25)
- 이 돌은 높이 1.1미터, 폭 0.8미터에 무게는 760킬로그램이었다. 위쪽이 울퉁불퉁해 이것이 본래 더 큰 것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27)
- 프랑스와 영국의 두 맞수 천재가 이 암호를 푸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둘 다 젊었고, 둘 다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모든 측면에서 상반됐다. 영국인 토머스 영은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축에 속하는 천재였다. 프랑스인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한 우물만 파는 천재로,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이집트뿐이었다. 영은 차분하고 우아하게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었다. 샹폴리옹은 분노와 조바심이 넘쳐흘렀다. 영은 이집트의 '미신'과 '타락'을 비웃었다. 샹폴리옹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의 장려함에 탄성을 질렀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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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점은 말하기는 자연발생적이지만 쓰기는 고안돼야 했다는 점이다. 말은 기어가기나 걷기처럼 우리의 생물학적 유산 가운데 하나다. 쓰기는 전화기나 비행기처럼 인간 창의력의 산물이다(그 엄청난 약진의 이야기는 사라져 회복할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거기에 대해 쓴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40)
- 로제타석은 딱딱한 돌덩이로 만들어진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보면 추적과 해독이라는 것의 핵심에 관해서뿐만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과 역사의 뒤안길과 인류 문화의 진화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43)
- 대피라미드는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기념물이다.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돌로 된 산이며, 전제가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것은 200만 개 이상의 돌 토막으로 만들어진 40층 높이의 건축물이다. 돌 토막 하나의 무게는 평균 2톤이며, 높이는 허리까지 차고 폭은 몇 미터에 이른다. 이 토막들은 매우 잘 맞물려 있어 어디를 찔러도 칼날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 산을 쌓는 데 꼬박 20년의 가혹한 노역이 필요했다. 계산을 약간 해보면 이 피라미드에 노동력이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있다. 평균적으로 일꾼들은 2톤짜리 돌 토막을 5분마다 한 개씩, 밤낮 쉬지 않고 20년 동안 운반해야 했다. (59)
- 1799년 여름에 나폴레옹은 시리아에서의 낭패를 멋진 승리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그는 카이로에서 축하 행진을 마련하고 군악대를 동원했으며 병사들에게 신품 군복까지 입혔다) 그 일환으로 피에르프랑수아 부샤르와 그 휘하 병사들은 로제타 요새 재건에 나섰다. 7월 초, 부샤르는 이상한 돌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 부샤르는 자신이 보물을 발견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86)
- 로제타석은 성체자, 속체자俗體字, demotic (간체자의 이름이다), 그리스 문자 등 세 가지 문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이집트어와 그리스어 두 가지 언어였다. 현대의 상황으로 대략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문서라 할 수 있다. 우선 굽이치는 서체로 우아하게 쓴 영어를 몇 줄, 다음에 역시 영어로 서둘러 필기한 같은 내용의 몇 줄, 마지막으로 그리스어를 그리스 문자로 쓴 역시 같은 내용의 글이다. (101)
- 로제타석은 2천 년 이상 시간의 파도에서 떠돌다가 마침내 발견된 병 속에 담긴 궁극적인 메시지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 곧바로, 그것이 서 있는 곳에서 읽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문화가 사라지고 수천 년 뒤에 그것이 발견되자 그것은 마치 낯선 세계와 처음으로 대화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108)
- 로제타석은 애처롭게도 적은 수의 성체자로 이루어졌다. 윗부분이 깨졌기 때문이다. (다른 두 부분의 길이로 판단하건대, 성체자 새김글의 절반 정도가 잘려나간 듯하다. 토머스 영은 1818년 한 이집트 탐험가에게 편지를 보내 사라진 부분을 찾아달라고 사정했다. "그것은 이집트를 연구하는 고고학자에게는 그만한 양의 다이아몬드에 맞먹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진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116)
- 우리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언어에 재능이 있는 천재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그들의 천재성도 극명하게 다른 형태였다. 토머스 영은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학자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분야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열심히 달려들었다.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완전히 외골수였다. 이집트 이외의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123)
- 이집트의 비밀을 탐사하는 어떤 방법에 목말라 있는 해독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콥트어가 고대 이집트어에서 유래한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그를 대체한 것이냐였다. 샹폴리옹은 온 마음으로 전자를 받아들이고 이 사라진 언어 연구에 뛰어들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진짜 목표인 이집트어에 더 가까이 다가설 것이라고 열렬하게 믿은 것이다. (130)
- 20세기 수학자 마렉 카츠는 리처드 파인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두 부류가 있다. '보통' 천재와 '마법사'다. 보통 천재는 당신도 나도 그만큼 될 수 있는 동류다. 우리가 여러 곱절 나아지기만 하면 된다. 그런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없다. 그가 한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마법사는 다르다. 영은 마법사 부류다. 자신의 재능을 눈에 띄는 어떤 수수께끼로도 돌릴 수 있어 보인다. 그가 이집트에 관심을 가진 건 이집트의 매혹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장 끌리는 수수께끼에 답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샹폴리옹은 '그저' 뛰어난 연구자였다. 소년 시절 이래로 이집트의 모든 것 속에 푹 빠져 살았다. 영은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샹폴리옹은 한 문화의 모습을 밝히고 싶었다. (136)
- 영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디서 이름들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로제타석의 열네 줄 성체자에서 각기 몇 개의 성체자를 둘러싸고 있는 대여섯 개의 타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타원체들이 특별한 것이었을까? 나폴레옹 군대의 연구자들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이 타원체를 카르투슈cartouche라 불렀다. '탄약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다. 모양이 소총 탄약통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몰랐다. (155)
- 로제타석을 가진 영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성체자 이름을 읽어냈다. 그것은 한 단어일 뿐이었지만, 1500년 만에 처음 읽은 단어였다. 단어 하나에서 전체 언어까지는 갈 길이 너무 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데서 한 단어로 가는 길은 더 멀다. 영은 그 틈새를 메웠다. (161)
- 1814년 무렵부터 1820년 무렵까지 영은 로제타석을 대체로 독점했다. 이 시기는 샹폴리옹에게 불운의 시기였다. 그의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예측하기 어려운 병치레들을 했다. (163)
- 샹폴리옹은 상당히 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좌절하고 혼란스러워했다. 현재까지(이때는 1821년이었고, 그는 이집트와 성체자에 10년 이상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카르투슈에 들어 있는 이름 수십 개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이 아직 전모를 보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영도, 다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들은 거의 도달한 상태였다. 물론 그들이 그 사실을 알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251)
- 1822년 9월 14일 정오가 되기 전이었다. 샹폴리옹은 필사본 한아름을 와락 낚아채고 쿵쿵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거리로 달려 나가 그 소식을 쏟아놓고자 했다. 형은 어디 있지? 일하고 있었다. 프랑스문학원이었다.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샹폴리옹은 그 큰 건물로 뛰어 들어가 형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필사본을 형의 책상 위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내가 해냈어Je tiens mon affaire!" 그러고는 까무러쳐버렸다. (286)
- 졸도하고 2주 뒤인 9월 27일, 샹폴리옹은 파리 프랑스문학원에서 몰입한 청중들에게 자신의 작업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음산하고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지만, 파리에서는 며칠 동안 샹폴리옹이 놀랄 만한 일을 공개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돌았고 강의실은 꽉 들어찼다. (288)
- 전통에 따라 샹폴리옹의 논문은 〈다시에 씨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 M. Dadier〉라는 공식적인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봉조제프 다시에는 프랑스문학원 원장이었다) 편지가 이만큼의 뉴스를 만들어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샹폴리옹은 청중들에게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리스와 로마 지배자들의 이름을 표기하기 위해 성체자 자모를 고안했다고 말하고, 자신의 해독 작업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했다. (289)
- 샹폴리옹은 '다시에' 강연에서 영을(또는 다른 누구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샹폴리옹이 보기에 영은 장난으로 하는 과학자였다. 자신의 본래 영역에서 아주 먼 곳들도 돌아다녔다. 영이 보기에 샹폴리옹은 명석한 젊은 조수였다. 영이 스케치한 그림의 세부를 채워준 사람이자, "내 연구의 어린 조수"였다. 샹폴리옹은 영에게 냉소를 보내며 일축했고, 영은 너그러운 미소로 샹폴리옹을 아이 취급했다. (292)
- 샹폴리옹은 이 복잡한 전체 구조와 씨름했고, 1824년에 이렇게 썼다. 그의 어조는 그가 추론해낸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자부심과 그 구조가 얼마나 복잡하고 임기응변적인 것으로 드러났는지에 대한 그의 놀람이 모두 반영된 것이었다. 성체자 글은 복잡한 체계다. 어떤 문자는 같은 글에서, 같은 문장에서, 그리고 같은 단어에서 동시에 그림이기도 하고 부호이기도 하고 음의 표기이기도 하다. (307)
- 샹폴리옹은 영이 이집트를 염두에 두지조차 않았을 때부터 거기에 매달렸다. 이후 영이 첫 번째 돌파구를 열었지만, 샹폴리옹은 그를 따라잡았고 그 이후 이 분야는 거의 그의 독무대가 됐다. 이후 긴 세월 동안 두 사람의 당파들은 길고도 해소할 수 없는 전쟁을 벌여왔다. 영예는 큰 그림을 처음 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근면성과 창조성을 발휘해 이야기를 아이디어에서 증명으로 바꿔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까? 영광을 차지할 사람은 용의자를 처음 지목한 형사일까, 사건을 해결해 그를 감옥에 보낸 형사일까? (359)
- 샹폴리옹은 다른, 훨씬 어려운 과업을 떠맡았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단어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을 '읽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영은 암기용 카드를 잔뜩 만들었고, 샹폴리옹은 무슨 단어든지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설명서를 엮은 것이다. (364)
- 영은 사전의 96쪽까지 겨우 마치고서 영원히 연필을 놓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마지막까지 의사였던 영은 자신이 "불만을 보다 급속하게 악화시키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음"에 가벼운 놀라움을 표하며 스스로에게 만족했다. 그는 1829년 5월 쉰다섯의 나이로 죽었다. 샹폴리옹은 영보다 겨우 3년을 더 살았다. 그는 건강한 적이 없었고, 젊은 시절 자주 경험했던 졸도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그로 하여금 열광과 낙담 사이를 오르내리게 한 감정의 기복 역시 마찬가지였다. (383)
신의 기록
The Writing of the Gods: The Race to Decode the Rosetta Stone, 2021/에드워드 돌닉
Edward Dolnick/이재황 역/책과함께 20221219 432쪽 25,000원
로제타석(Rosetta Stone)은 1799년 7월 15일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 동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나일강 어귀의 로제타(현 지명 라시드 Rashid) 마을에서 요새를 쌓다가 발견했습니다. 높이가 114.4cm, 너비는 72.3cm, 두께는 27.3cm이며 무게는 760kg인 화강섬록암으로 핑크빛이 도는 어두운 회색 돌입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넬슨이 지휘한 영국군에게 대패해서 1802년부터 영국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로제타석을 해석하려고 했지만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0613~18290510)과
장프랑수아 샹폴리옹(Jean Francois Champollion, 17901223~18320304)이 나타나기까지는 아무도 풀지 못했습니다. 토머스 영은 의사였지만 물리학, 생리학, 광학, 언어학, 심리학,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다재다능한 천재였고(1807년에 ENERGY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샹폴리옹은 오로지 이집트에만 매달려 한 우물만 판 천재였습니다. 둘 다 10여 개를 넘는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 천재였습니다. 토머스 영은 로제타석 성체자(상형문자) 해독을 여는 실마리를 제공했고, 샹폴리옹은 성체자를 푸는 마지막 문을 열었습니다. 두 사람을 잇는 계파는 한때 격렬하게 치고받으며 서로를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마치 "영광을 차지할 사람은 용의자를 처음 지목한 형사일까, 사건을 해결해 그를 감옥에 보낸 형사일까?"처럼 말이죠.
샹폴리옹과 영의 경쟁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같은 지적 맞수들의 경쟁과는 달랐습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서로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두 경쟁자는 이상적인 협업자였습니다. 영은 늘 맨 먼저 장애물을 제거했고, 샹폴리옹은 바통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수수께끼를 붙들고, 더 깊이 더 멀리 들여다봤습니다. 샹폴리옹은 방대한 주제에 매달리다 보니 이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1822년 〈
다시에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판했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영은 《이집트어 사전의 기초》를 96쪽까지 마치고 영원히 연필을 놓았고, 샹폴리옹은 《이집트어 문법
Grammaire égyptienne》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로제타석 문자는 3천 년이 넘게 존속한 나라의 문자이지만 천 년 넘게 아무도 쓰지 않은 글자입니다. 펼쳐진 책이었던 이집트는 갈피마다 그림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어떻게 읽는지 몰랐습니다. 영과 샹폴리옹이라는 두 천재가 나타나자 비로소 이집트의 문이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