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 ‘오월’의 마지막 부분이다.
-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
-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
- 하늘에 별을 쳐다볼 때 내세가 있었으면 해보기도 한다.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해본다. 그리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는 참 염치없는 사람이다. (晩年)
한국 수필의 아버지 금아 선생이 향년 97세로 25일 별세했다.
영문학자의 길을 걸었던 금아 선생의 글은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라고 밝혔듯이 맑고 정갈하다. 영문학자의 길을 걸었으면서도 번역투나 고어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70년대 중반 이후 "잊혀졌다고 생각하고 섭섭해서 별것들을 써내는데 옛것보다 못한 것들이야. 차라리 가만히 있는게 나아"라며 수필 창작 활동을 멈추었다.
금아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오래전에 읽었던 《수필》을 꺼내 들고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본다. 떠남과 보냄의 미학이라는 금아 작품에 대한 해설을 보며 선생과 아사코를 생각하니 새삼스레 추억에 잠긴다. 금아 선생은 사랑을 하고 가셨다.
내 책꽂이에 있는 《수필》은 1996년에 발행한 문고판(3판 6쇄, 범우사)이다. 오늘은 십여 년 전 책에서 인연을 떠올린다.
그렇게 밝고 맑은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