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무가네 보이스

me
몇 해 전 직장 동료였던 한모 차장이 자리에 들렸다가 이면지에 나를 그려줬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악기를 하나 배워 보고 싶던 차에 인사동에 갈 일이 있었고 마침 낙원상가가 근처에 있어 무작정 발길을 돌렸다.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들려서 사 온 것이 색소폰이다. 끝이 꼬부라진 멋있는 놈으로 고르려니 주인장은 초보자에게 너무 어렵다며 알아서 골라 준다. 더 싼 거 없어요? 대만제가 제일 싸다며 그걸로 하겠느냐기에 거금 30만 원을 카드로 긁었다.

딸려 온 초보 색소폰 교본을 보며 마우스피스를 끼워 넣고 바람을 불었다. 소리가 난다. 다음날 회사에서 색소폰을 샀다고 자랑을 하며 올 송년회를 기대하라고 했다. 내가 멋지게 색소폰 연주를 해주겠노라고.

음계 연습을 한답시고 도레미를 손가락으로 잡고 부는 연습을 하다 잘 닦아서 상자에 고이고이 모셔서 옷장 한구석에 세워 놨다. 흐뭇해하면서. 내일부터 연습하지 뭐. 늦게 퇴근하고 저녁 술자리도 잦아지다 보니 그놈을 꺼내 볼 새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지금 그놈은 내방 책상 밑에 가로로 누워있다. 편안하게.

색소폰이 잠든 지 이삼 년 후. 아침 출근버스를 타고 막 정문을 들어서는데 앞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공장에서는 규정속도가 시속 30km로 한정돼 있어 버스가 그 자전거를 뒤따라 가는데 문득 외발 자전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쇼핑몰에 들어가 탐색을 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다. 바퀴가 하나뿐인데 값은 두발자전거보다 비싸고 무슨 종류가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바퀴 크기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초보자가 타기에 쉬운 18인치로 결정했다. 허름한 놈으로 고르니 이번에도 대만제가 제일 싸다. 결정을 하자마자 바로 질렀다.

며칠 후 도착한 외발 자전거를 조립하고 안장에 앉아서 균형을 맞춰보니 몸을 가눌 수도 없고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 주말에 밖에 나가 난간을 부여잡고 연습을 시작해야지 하며 현관문 앞에 세워 놨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고 그동안 문을 열고 나다니기에 가로거치고 무척 불편했지만 외발 자전거는 처음 그 상태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년 전인가 이사를 하게 돼서 이삿짐을 다 나르고 외발 자전거를 놓을 때가 마땅치 않아 1층 계단 옆에 세워놨다. 다음날 아침에 내려가 보니 자전거가 없어졌다. 이런 젠장. 자물쇠 없이 놔뒀더니 누군가 재활용품으로 오인해서 들고 갔나 보다. 땅을 한 번도 밟아 보지도 못했고 달라는 사람도 많았지만 몇 년 동안 현관문만 지키던 놈이기에 아까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미안하다 외발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한 차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쓰윽하고 그려준 것이 저 그림이다. 박씨네 둘째 아들인 것도 알고 있고 한 번 심통을 부리면 막무가내라고 써준 말이다.

참人生. 앞으로 바르게 잘 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막무가내로 살았지만 삐뚤게 살지 않았다는 격려일 수도 있다. 외발 자전거에 올라타 색소폰을 부는 모습이 정말 철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렇게 살고 싶은 게 진짜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