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올해 107회째가 되는 2007년 US OPEN Golf에서 앙헬 카브레라가 우승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카브레라는 15살이 되던 해 그 당시 아르헨티나가 낳은 세계적인 프로골퍼 에두아르도 로메로가 헤드 프로로 일하던 골프장 캐디로 취직하면서 골프를 시작하게 됐고 남미 출신이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1967년 브리티시 오픈에서 로베르토 데빈센조(아르헨티나)의 우승 이후 40년 만이란다. 더군다나 추격하는 타이거 우즈와 짐 퓨릭(이상 미국.6오버파 286타)을 1타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대회 마지막 날 경기가 월요일 새벽 네 시(한국시간)부터 중계방송을 시작하는 터라 꼼지락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전날 선두였던 배들리가 우즈와 마지막 조로 나서며 무너지기 시작한 초반 3번 홀까지 보다 잠이 들었다. 다행히 낮에 케이블 TV에서 후반부 경기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계방송 도중에 아나운서와 해설자 왈.
"1타차로 경기를 마친 카브레라와 뒤쫓아 오는 우즈나 짐 퓨릭 중 누가 유리할까요?"
"경기가 벌어지는 펜실베이니아주 오크몬트 골프장(파70.7천230야드)은 언더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카브레라가 우승할지도 모르겠어요."

카브레라
그러면서 카브레라 선수가 1969년생이라고 언급을 한다. 그 멘트를 듣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젊게 봐줘도 40대 중반은 돼 보이는데 나보다 어리다니. 짜슥. 내 동생뻘이잖아.

사실 그랬다. 무명에 가까운 카브레라 선수 프로필을 모르니 방송에 나오는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특히 서양인은 외모만 봐서는 연식을 가늠할 수 없다. 물론 같은 동양인끼리도 짐작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2005년 1월 말. 골프에 입문해서 드라이버도 잡아 보지 못하고 7번 아이언으로 똑딱이 연습만 하다 느닷없이 머리를 올리러 간 곳이 필리핀 마닐라였다. 같이 간 일행 분들은 5년이나 10년 연상이었지만 캐디들은 자치기 놀이하는 내 눈치를 더 보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황제 골프를 치고 있으니 그늘집에서 쉬는 시간도 많아 아이스 맥주를 마시며 노닥거리다 일행 중 한 분이 검지 손가락으로 우리를 싸잡아 가리키며 캐디들에게 물었다.

"Hey. Old boy?" (누가 제일 늙어 보이냐?)

일제히 손가락으로 날 가리킨다. 이유가 뭐냐고 되묻자 머리가 하얘서 그렇단다. 헉. 새치가 좀 있기는 하지만 내가 나이가 제일 들어 보이다니. 急OTL

하지만 피장파장이다. 캐디들이 모두 30대로 보였지만 제일 나이 든 아줌마가 30대 초반이고 모두 20대 초중반이란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서로 낄낄대고 웃었던 기억이 있다.

심리학에 첫인상 3초의 법칙이 있단다. 단 3초면 그 사람을 파악한다고 한다. 카브레라 선수를 보는 순간 오십은 돼 보인다고 넘겨 짚었다. 나이만 가늠한 것이 아니라 고생 끝내고 이제는 출세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정확히 틀렸다. 그동안 PGA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2001년 유럽골프투어 아르헨티나오픈에서 생애 첫 빅리그 우승을 했고 한때 세계랭킹 9위까지 오르기도 했다는 걸 우승기사를 보고 알았다.

첫인상. 참 중요하다. 그렇다고 첫인상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닐 게다. 오늘 처음 본 카브레라 선수를 비롯해 지금까지 만난 분들을 보자마자 그렇게 단정 짓지는 않았나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3초 만에 내 첫인상을 결정했으리라.

하지만 점쟁이 빤쓰를 입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사람을 3초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으랴.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이에게서 뜻밖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좋든 싫든 시간이라는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 익숙해 지는게 더 좋다. 사람은 더 깊이 사귀어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고 그러면서 점점 friend(친구는 또래라는 뜻이 강해 friend 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가 되어간다.

카브레라 선수 덕분에 오늘 한 수 배웠다. 상대방에게는 좋은 첫인상을 남기도록 온 힘을 다하고 내가 보는 타인의 첫인상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아니니 속단하지 말라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노력은 하며 살아야지. 보자마자 예쁜 모습만 집어내는 족집게 속성학원은 어디 없을까?


덧. 지난해 초 같이 술 마시던 짱가라는 후배가 바람막이와 보스톤백을 포함해서 골프세트를 홀라당 자기 차에 싣고 나른 뒤부터 TV 중계를 보며 이미지 스윙만 열심히 하고 있는 신세다. 혼마 아이언세트, 다이와 드라이버세트, 퍼터는 히로마쓰모토였는데 아깝다. 자기 중고차보다 값이 더 나가는 풀세트를 들고 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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