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서워하는 사람

등산을 같이하기로 한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 남한산성 책 갖구와

지난 제헌절에 남문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남한산성을 일주하고 동동주를 한잔하며 이제 《남한산성》을 완독 해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산행 길에 가지고 오라는 말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일이 닥쳤다.

사실 나는 책을 빌려 달라는 사람이 돈 빌려 달라는 사람보다 더 무섭다. 보너스 받은 날, 기가 막히게 알고 급하게 돈 빌려 달라는 친구에게 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니 통화 끝나기 무섭게 넣어 주곤 한다. 당장 통장이 바닥이라도 사정을 듣고 나면 현금 서비스라도 해서 넣어 주기도 했다.

급하게 빌린 돈은 여유가 되면 제일 먼저 돌려줘야 할 텐데 그 사람들은 까맣게 잊고 있는지 돌려받은 기억이 없다. 빌려 준 돈이야 어찌 보면 적은 액수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쌓이다 보니 지금은 조그마한 소도시에 집 한 채 값은 족히 될 듯싶다. 또 그런 돈은 날짜를 정해 돌려받을 생각도 없고 어쩌다 조금이라도 되돌려 주면 오히려 내가 고맙고 공돈을 받은 것 같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책 욕심은 있어 누가 빌려 달라고 하면 선뜻 내주기가 쉽지 않다. 가끔 서점에 가서 책을 훑어보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아예 두 권을 산다. 읽다 보면 이 책을 읽어 볼 사람이 떠오르고 한 권을 선물로 주곤 한다.

그동안 경험에 의하면 빌려 준 책을 한 번도 되돌려 받지를 못했다. 만원이면 살 수 있는 책을 빌려 달라는 사람 치고 열에 여덟은 다 읽지도 않고 한구석에 처박아 놓기 십상이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빌려 가서 되돌려 주지 않는 사람은 훔친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다. 눈 뜨고 있는데 코 베간 사람이다.

빌려 간 사람이야 까짓 돈 만원짜리 종이로도 생각하지 않겠지만 빌려 준 사람은 책꽂이가 허전한 게 맞추다 만 퍼즐 같은 기분이다. 다 읽었으면 돌려 달라는 말도 못 한다. 아직 다 읽지 못했다거나 행여 그 책이 어디 있더라 하며 기억을 더듬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다.

비가 와서 산행이 취소되는 것은 반갑지 않고, 둘러댈 핑계거리를 생각하느라 완소남은 더 작아진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