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칼라 테레비를 보다 인터넷에 길을 묻다
1. 6.29 선언은 칼라 테레비가 만들었다?
87년 6월 항쟁의 결정적인 시발점은 호헌철폐를 외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고, 그 열망이 그해 여름을 뜨겁게 했다. 절대권력이 만든 철권통치 시대에 민주화 열망으로 기꺼이 동참한 민중은 끝내 6.29 선언을 이끌어 냈고,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6.29 항복선언이 민주화 염원에 대한 결과라면 그것을 촉발시킨 원동력은 무엇일까?
전두환은 피로 정권을 잡고 성난 민심의 관심을 돌리려고 3S 문화정책을 시행한다. 이른바 Sport, Sex, Screen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민중을 정치로부터 무관심하도록 시선을 돌리게 하는 우민화 정책을 편다. 야구를 좋아했던 전통은 프로야구단을 만들었고, 에로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디오가 나오면서 포르노를 맘껏 볼 수 있게 만든다. 칼라 방송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당시 집에 있던 테레비는 미닫이로 브라운관을 가려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 네 발 달린 흑백 테레비였다. 칼라 테레비가 가전제품 쇼윈도에 진열되면서 구매 목록의 첫 번째를 차지하게 된다. 가격도 상당한 고가여서 20만 원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의 절반이었다. 칼라 테레비가 나올 거라는 소식에 사긴 사야겠는데 너무 비싸다는 걸 알고 아주 커다란 돼지 저금통에 100원짜리 동전을 가득 채우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친구들과 하기도 했다.
총천연색 세상을 만들다
칼라 테레비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주위에서 총천연색을 접하던 것이라곤 단체관람 영화와 선데이 서울 가운데에 있던 길게 늘어지는 수영복 입은 화보밖에 없던 시절에 색깔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흑과 백으로 보이던 세상을 총천연색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생각도 총천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흑과 백으로만 가득하여 천편일률적이던 뇌의 구조가 시나브로 다양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각자 좋아하는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개성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갇혀 있던 관념의 족쇄가 풀리며 생각은 들판의 꽃들처럼 흐드러지게 피게 된다.
그렇게 예뻐 보이던 여배우가 색깔을 입으니 기미도 보이고 작은 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티끌이 자연스럽게 나타났고, 그럴수록 여배우는 우리 옆에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 돼갔다. 물론, 두꺼운 화장을 하게 되는 폐단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지만.
정치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땡전 뉴스를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됐고, 주입식 화면을 거부할수록 주관식 의문을 가지며 변화의 조짐이 잉태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결국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라는 말을 믿지 않으며 끝내 억누르던 총천연색 열망은 거대한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6월 항쟁으로 나타났다.
칼라 테레비가 6월 항쟁으로 나타났다는 인과관계나 학술적 근거를 밝히라면 할 말이 궁색해진다. 그렇지만 만약 86 아시안 게임도 열리지 않았고, 88 올림픽이 예정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흑백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면 6월 항쟁은 몇 해 더 늦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민화를 위한 칼라 방송이 결국에는 6.29 선언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역사의 아이러니 혹은 선순환은 아닐까?
2. 촛불을 밝힌 인터넷
인터넷을 처음 접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시장에 내놓기 전에 미리 사내 시운전을 하던 유니텔이라는 PC 통신을 처음 접하고 채팅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그리 신기했는지 퇴근도 미루던 시절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것도 모르고 넷스케이프는 더더욱 생소했지만 정보화 자격증을 반강제로 따야 했다. 넷스케이프를 이용해서 주어진 문제에 대해 검색을 하고 찾아낸 정답과 주소를 함께 적어냈다. 지금이야 너무 많은 검색결과가 나와 선별하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지만 당시에는 네 문제를 한 시간에 풀어야 할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신문을 화장실로 보내다
플레이 보이에서 므흣한 사진이나 보며 낄낄대던 무렵 인터넷 확산의 기폭제가 나타난다. 오양 비디오 사건은 인터넷 문외한을 컴퓨터 앞에 앉게 했다. 학창시절, 여름에 해수욕장에 놀러 가면서 어깨에 커다란 카세트를 얹고 갔듯이 바야흐로 인터넷은 내 눈으로 들어와 지화자 하며 함께 놀게 된다.
넷스케이프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익스플로러가 슬며시 자리 잡으며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배달된 조간신문은 접힌 상태 그대로 하루가 지나는 날이 많아졌고, 어쩌다 간택된 행운을 잡은 신문은 화장실에서 몇 번 펼쳐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근무시간에 어떻게 땡땡이를 쳤는지 기억도 나질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졌다. 주식 좋아하는 이들은 순간순간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했으며, HTML을 배워 개인 홈페이지를 꾸미게 된 것이 99년 말이다.
인터넷, 생활 속에서 진화하다
인터넷은 이제 생활이 되었다. 그냥 물 흐르듯 생활의 일부분이 돼 버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여름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팥빙수를 만들어 먹었던 것처럼. 오죽하면 시골집에 놀러 온 막 걷기 시작하는 꼬맹이까지 컴퓨터가 보이지 않으니 재미없다며 빨리 제집으로 돌아가자며 보채는 시대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지내던 날. 쇼킹한 사건이 일어났다. 촛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백 만개의 촛불이 불사조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쟁을 생중계로 보기도 했고 미국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테레비에서 보기도 했지만 시위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내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느꼈던 인터넷이 말을 걸기 시작하고 대화를 하며 토론을 하고 있다. 자발적 상호작용을 하고 정반합의 변화를 거듭하며 진화한다. 그곳에서는 나이, 성별, 학력을 불문하고 오로지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가는 원초적 생각의 광장이 된다. 이천 년 전 넓은 광장에서 소통하던 소크라테스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광장에 운집해 대화하는 수많은 소크라테스로 환생했다.
쌍방향 소통을 원하는 인터넷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와 촛불을 밝혔음에도 권력은 인터넷을 증오하며 일회성 조건반사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하려고 한다. 화장실이나 휴지통을 전전하는 처지로 전락한 소수 신문이 떠드는 민중은 우매하다는 소리를 철석같이 믿으면 정말 곤란하다. 인터넷은 이미 지난날 칼라 테레비처럼 우리를 바꿔 놓고 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이미 우리와 공생하고 있다. 세상은 인터넷에 길을 묻고 인터넷은 세상과 접속하려고 한다.
3. 에필로그
칼라 테레비는 이분법적 사고를 다양하게 확장했고, 인터넷은 다양한 사고의 공통점을 찾아 정방향 지향점으로 움직인다. 물론 칼라 테레비가 두꺼운 화장으로 진실을 은폐했듯이 인터넷은 익명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굴절돼 보이는 물 잔 속의 젓가락을 꺼내보면 항상 바르듯이 왜곡된 진실을 물속에서 꺼내 볼 줄 아는 현명함을 인터넷은 깨우치고 있다.
지금 인터넷이 큰소리로 하는 대화를 듣지 못했던 권력은 촛불로 나타난 민심에 당황하고 있다. 하지만 더 커다란 근심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예측을 못 하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야누스의 모습을 한 인터넷을 보며 칼을 들을지 악수를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스로 쥐를 잡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 모두 불행한 일이다.
87년 6월 항쟁의 결정적인 시발점은 호헌철폐를 외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고, 그 열망이 그해 여름을 뜨겁게 했다. 절대권력이 만든 철권통치 시대에 민주화 열망으로 기꺼이 동참한 민중은 끝내 6.29 선언을 이끌어 냈고,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6.29 항복선언이 민주화 염원에 대한 결과라면 그것을 촉발시킨 원동력은 무엇일까?
전두환은 피로 정권을 잡고 성난 민심의 관심을 돌리려고 3S 문화정책을 시행한다. 이른바 Sport, Sex, Screen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민중을 정치로부터 무관심하도록 시선을 돌리게 하는 우민화 정책을 편다. 야구를 좋아했던 전통은 프로야구단을 만들었고, 에로영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디오가 나오면서 포르노를 맘껏 볼 수 있게 만든다. 칼라 방송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 당시 집에 있던 테레비는 미닫이로 브라운관을 가려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 네 발 달린 흑백 테레비였다. 칼라 테레비가 가전제품 쇼윈도에 진열되면서 구매 목록의 첫 번째를 차지하게 된다. 가격도 상당한 고가여서 20만 원 내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의 절반이었다. 칼라 테레비가 나올 거라는 소식에 사긴 사야겠는데 너무 비싸다는 걸 알고 아주 커다란 돼지 저금통에 100원짜리 동전을 가득 채우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친구들과 하기도 했다.
총천연색 세상을 만들다
칼라 테레비는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주위에서 총천연색을 접하던 것이라곤 단체관람 영화와 선데이 서울 가운데에 있던 길게 늘어지는 수영복 입은 화보밖에 없던 시절에 색깔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흑과 백으로 보이던 세상을 총천연색 세상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생각도 총천연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흑과 백으로만 가득하여 천편일률적이던 뇌의 구조가 시나브로 다양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각자 좋아하는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개성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갇혀 있던 관념의 족쇄가 풀리며 생각은 들판의 꽃들처럼 흐드러지게 피게 된다.
그렇게 예뻐 보이던 여배우가 색깔을 입으니 기미도 보이고 작은 점도 보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던 티끌이 자연스럽게 나타났고, 그럴수록 여배우는 우리 옆에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 돼갔다. 물론, 두꺼운 화장을 하게 되는 폐단도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지만.
정치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땡전 뉴스를 해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됐고, 주입식 화면을 거부할수록 주관식 의문을 가지며 변화의 조짐이 잉태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결국 '탁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라는 말을 믿지 않으며 끝내 억누르던 총천연색 열망은 거대한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6월 항쟁으로 나타났다.
칼라 테레비가 6월 항쟁으로 나타났다는 인과관계나 학술적 근거를 밝히라면 할 말이 궁색해진다. 그렇지만 만약 86 아시안 게임도 열리지 않았고, 88 올림픽이 예정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흑백 테레비를 보고 있었다면 6월 항쟁은 몇 해 더 늦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민화를 위한 칼라 방송이 결국에는 6.29 선언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역사의 아이러니 혹은 선순환은 아닐까?
2. 촛불을 밝힌 인터넷
인터넷을 처음 접한 것은 십여 년 전이다. 시장에 내놓기 전에 미리 사내 시운전을 하던 유니텔이라는 PC 통신을 처음 접하고 채팅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그리 신기했는지 퇴근도 미루던 시절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것도 모르고 넷스케이프는 더더욱 생소했지만 정보화 자격증을 반강제로 따야 했다. 넷스케이프를 이용해서 주어진 문제에 대해 검색을 하고 찾아낸 정답과 주소를 함께 적어냈다. 지금이야 너무 많은 검색결과가 나와 선별하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지만 당시에는 네 문제를 한 시간에 풀어야 할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었다.
신문을 화장실로 보내다
플레이 보이에서 므흣한 사진이나 보며 낄낄대던 무렵 인터넷 확산의 기폭제가 나타난다. 오양 비디오 사건은 인터넷 문외한을 컴퓨터 앞에 앉게 했다. 학창시절, 여름에 해수욕장에 놀러 가면서 어깨에 커다란 카세트를 얹고 갔듯이 바야흐로 인터넷은 내 눈으로 들어와 지화자 하며 함께 놀게 된다.
넷스케이프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익스플로러가 슬며시 자리 잡으며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배달된 조간신문은 접힌 상태 그대로 하루가 지나는 날이 많아졌고, 어쩌다 간택된 행운을 잡은 신문은 화장실에서 몇 번 펼쳐지지도 못하고 그대로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근무시간에 어떻게 땡땡이를 쳤는지 기억도 나질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졌다. 주식 좋아하는 이들은 순간순간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했으며, HTML을 배워 개인 홈페이지를 꾸미게 된 것이 99년 말이다.
인터넷, 생활 속에서 진화하다
인터넷은 이제 생활이 되었다. 그냥 물 흐르듯 생활의 일부분이 돼 버렸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여름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팥빙수를 만들어 먹었던 것처럼. 오죽하면 시골집에 놀러 온 막 걷기 시작하는 꼬맹이까지 컴퓨터가 보이지 않으니 재미없다며 빨리 제집으로 돌아가자며 보채는 시대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지내던 날. 쇼킹한 사건이 일어났다. 촛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백 만개의 촛불이 불사조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전쟁을 생중계로 보기도 했고 미국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테레비에서 보기도 했지만 시위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내 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느꼈던 인터넷이 말을 걸기 시작하고 대화를 하며 토론을 하고 있다. 자발적 상호작용을 하고 정반합의 변화를 거듭하며 진화한다. 그곳에서는 나이, 성별, 학력을 불문하고 오로지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가는 원초적 생각의 광장이 된다. 이천 년 전 넓은 광장에서 소통하던 소크라테스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광장에 운집해 대화하는 수많은 소크라테스로 환생했다.
쌍방향 소통을 원하는 인터넷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와 촛불을 밝혔음에도 권력은 인터넷을 증오하며 일회성 조건반사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하려고 한다. 화장실이나 휴지통을 전전하는 처지로 전락한 소수 신문이 떠드는 민중은 우매하다는 소리를 철석같이 믿으면 정말 곤란하다. 인터넷은 이미 지난날 칼라 테레비처럼 우리를 바꿔 놓고 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이미 우리와 공생하고 있다. 세상은 인터넷에 길을 묻고 인터넷은 세상과 접속하려고 한다.
3. 에필로그
칼라 테레비는 이분법적 사고를 다양하게 확장했고, 인터넷은 다양한 사고의 공통점을 찾아 정방향 지향점으로 움직인다. 물론 칼라 테레비가 두꺼운 화장으로 진실을 은폐했듯이 인터넷은 익명성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굴절돼 보이는 물 잔 속의 젓가락을 꺼내보면 항상 바르듯이 왜곡된 진실을 물속에서 꺼내 볼 줄 아는 현명함을 인터넷은 깨우치고 있다.
지금 인터넷이 큰소리로 하는 대화를 듣지 못했던 권력은 촛불로 나타난 민심에 당황하고 있다. 하지만 더 커다란 근심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지 예측을 못 하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야누스의 모습을 한 인터넷을 보며 칼을 들을지 악수를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우스로 쥐를 잡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 모두 불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