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고수와 짝퉁 고수

바둑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아다리 밖에 모르지만 중계방송하는 유명한 바둑 대회는 챙겨 보는 편이다. 요즘은 이세돌 9단을 비롯한 신진 세력의 약진으로 돌부처 이창호와 일지매 유창혁은 무시로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둘이 연실 국제 기전에서 이름을 휘날린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으니 바둑계가 상전벽해가 된 것 같다.

제비 조훈현과 잡초 서봉수가 한 세대를 풍미하고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난 청출어람이 반집도 센다는 신산 이창호와 대마 킬러 유창혁이다. 그 둘의 기풍이 워낙 극과 극이었지만 상대방 급소를 날카롭게 찌르며 대마를 잡는 최고 공격수 유창혁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곤 했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막힘없이 시원시원하게 두는 기풍은 결과에 관계없이 박진감 넘치는 한판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혜성처럼 떠오르던 시절. 신문에 실린 기보 해설을 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무협지를 보는 듯했다. 특히 몇 수도 놓이지 않은 포석 단계에서는 앞으로 반상에 몰아칠 폭풍우를 예고하는 장황한 해설과 함께 등장인물을 알려주곤 했다. 그중 한 명이 유창혁이었고 이름 석자를 기억하게 된 계기가 됐다.

포석이 끝나고 일전을 겨루던 중 유창혁은 좌하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손을 빼고 좌변 중앙 상대방 진영에 백돌을 하나 놓았다. 해설자는 그 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선수를 빼앗겼다고 아쉬워했다. 무림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바둑에서도 최강수로 버티며 일전을 겨루고 있는데 무의미하게 선수를 빼앗긴다는 것은 싸움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후 죄하변은 한 수 한 수가 외길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흑돌이 놓이면 백돌은 반드시 그곳에 놓일 수밖에 없는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16수가 진행되었을 때 두 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먼저 탄식을 지른 곳은 흑돌을 쥐고 일지매와 겨루던 기사였다. 대마불사라고 했건만 허무하게 흑대마가 잡히고 마는 불상사가 눈앞에서 벌어지자 저도 모르게 나온 탄식이었다. 또 다른 탄식은 기보 해설을 하던 해설자가 감탄하는 소리였다. 불과 조금 전에 무의미하게 두어서 선수를 뺏겼다고 아쉬워 한 백돌이 16수가 진행되자 흑대마를 잡는 빛나는 옥석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설자는 16수 앞을 내다본 유창혁의 혜안에 감탄하며 그것으로써 바둑은 끝이 났다고 방점을 찍었다.

모두가 의문을 품은 한 수였지만 유창혁은 16수 앞을 내다보고 던진 회심의 일격이었다. 흑은 그 한 수를 받았어야 했지만 좌하변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미처 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 벌어진 수순은 여러 가지 가상도로 살펴보아도 흑대마가 잡힐 수밖에 없는 외길 수순이었다. 그 후 유창혁은 세계적인 기전에서 날렵한 솜씨를 뽐내며 승승장구하여 입신의 경지에 오른다. 바야흐로 무림 고수의 반열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요즘 그런 고수를 뉴스에서 보았다. 쌀 소득보전직불금이라며 평균 60만 원씩을 챙긴 양반들이 그들이다. 그네들은 60만 원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한 끼 외식비 밖에 안 되는데 왜 꼬박꼬박 챙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농지를 사서 8년 동안 직접 경작하고 있다는 게 증명이 되면 세액에서 1억 원까지 양도 소득세를 감액해주게 돼 있다고 한다. 반면에 자경이 아닌 비사업용 농지에 대해서는 양도차익의 66%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가장 짧은 경우 2년만 위장 전입하고 나서 직불금을 받으면 이를 근거로 낮은 양도세율을 적용받는다고 한다. 이러니 눈에 불을 켜고 직불금을 받으려고 한 까닭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006년 한 해에만 쌀 소득보전직불금 수령자 99만 8천여 명 중 17만여 명이 실제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1천683억 원을 부당하게 받았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그중 공무원은 약 4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농사짓지 않는 사람이 농지를 사기도 쉽지 않거니와 8년 후에 되팔아 생길 양도 소득세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혜안을 가지고 있어 부럽다. 가히 유창혁이 16수 앞을 내다본 한 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잘 몰랐습니다'라며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씨부리는 해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모르고도 그런 짓을 한 동물적 감각을 가진 타고난 고수임이 틀림없다. 만약 알고 그랬다면 더 무서운 필살기를 펼쳤으리라.

그런데 고수가 너무 많다. 자고로 고수라 함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희소성도 있어야 하는데 직불금 고수가 많게는 20여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가히 고수의 홍수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농사꾼 가슴에 봉홧불을 짚인 여인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고수의 실체가 상상 이상으로 커지자 고수 중의 고수를 골라내기 위한 정부의 고민이 더욱 커지나 보다. 물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고수만 가려내 퇴출시키는 시늉을 하고 나머지는 그저 생활의 달인이라고 평가절하하며 흐지부지 넘어가려고 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상한 건 직불금을 받은 양반들을 고수라 추켜세웠는데 경외심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은 짝퉁 고수이기 때문이다. 유창혁과 같은 진정한 명품 고수는 한 번에 두 수를 두지 않지만 짝퉁 고수는 상대방의 응수가 있기도 전에 이곳저곳에 꼼수를 둔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아는 이들이라면 진작에 짝퉁 고수가 되는 길로 들어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짝퉁 고수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여 직불금을 받아 보긴커녕 착불금만 내 본 소시민은 슬프다. 더군다나 가슴에 봉홧불이 활활 타오르는 농사꾼의 심정은 말로 해서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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