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라이크 미,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1959년 10월 28일
백인 남부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19)
11월 10일~12일
저들은 우리가 돈을 벌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는, 결국 수입이 없어서 세금을 많이 낼 수도 없게 하지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거의 모든 세금을 내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 저들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밀어놓고는 우리가 저 아래 뒤쳐저 있는 게 우리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85)
11월 14일
"......우리가 사람의 가치 또는 무가치를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정의를 통해서다. 정의가 없다면 바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플라톤.' 이 말이 금언의 형태로 달리 표현된 것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공평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106)
내가 속한 백인들이 증오의 시선을 보낼 수 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시들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슬펐다. 또한 자기들이 키우는 가축에게는 주저 없이 권리를 인정해 주면서도 인간에게는 이 권리를 함부로 빼앗는 점이 슬프다. (133)
올바른 법보다는 편리한 법이나 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려는 경향이 남부 주 의회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148)
11월 15일
이스트의 표현을 빌면 남부 지역의 '더러운 치부(assdom)'에 해당하는 사실을 수집해 놓은 정말 방대한 자료였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가장 더러운 세력은 무식하게 떠드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앞장서서 법안 제안서의 '초안'과 선전내용을 작성해 주는 법률가들이었다. (152)
11월 21일
이번에도 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모든 백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것, 예를 들어 식사할 만한 곳,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화장실, 손 씻을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188)
11월 25일
내가 만난 흑인들은 두 가지를 두려워했다. 우선 그들 중 누군가 폭력 행위를 저질러서 이 때문에 백인 입에서 흑인은 권리를 누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라는 말이 나오고 흑인을 위험스런 상황을 빠뜨릴까 봐 두려워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흑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책임한 백인의 섬뜩한 조소, 교도소, 기존의 주어진 틀이었다. (225)
12월 1일
백인이든 흑인이든 나는 어디까지나 똑같은 나였다. 그러나 백인일 때에는 백인으로부터 형제 같은 따뜻한 웃음과 특권을 제공받고 대신 흑인에게서는 증오의 시선이나 아첨을 받았다. 그러다가 흑인이 되면 백인은 나를 잡동사니 더미에나 어울릴 법하 존재로 여기는 반면 흑인은 나를 매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233)
12월 7일
남부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신문은 심지어 대도시 일간지조차 매우 근시안적이고 비겁한 모습을 보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백인 시민 평의회와 KKK단의 기관지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줄 정도로 편파적인 선전 활동을 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책임을 다하는 신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다. (257)
12월 15일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겪은 일은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 일이 너무 가까운 때에 일어난 일이었고, 너무 마음이 쓰라렸다. (269)
1960년 6월 19일
남부 지역의 보통 백인은 이웃 눈에 비치는 것에 비해 훨씬 올바른 성향을 지녔고 흑인보다는 오히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를 더 두려워한다는 내 주장이 이를 통해 확인되었다. (301)
에필로그 1976년
《블랙 라이크 미》를 쓰기 위한 실험은 1959년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이뤄졌다. (...) 그 시절에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면 나치가 유대인을 억압했던 일이나 집단 수용소, 가스실 같은 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거칠게 항의했다. (311)
내가 가진 인간 개인의 자질을 보고 나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내 피부색을 보고 판단했다. (...) 백인은 흑인이 자신과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여긴다. (312)
1967년에 성냥불이 그어지고 화약고가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체제전복 세력의 음모라는 견해 속으로 숨어 버렸다. (338)
1979년
《블랙 라이크 미》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한 인간을 판단할 때 인간성 면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의 피부색이나 철학적으로 '우연한 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미친 상황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363)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 아파하고, 자신과 자기 아이들을 위한 인간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저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죽는, 이 모든 동일한 근본 문제에 똑같이 부딪힌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진리며, 모든 문화, 모든 인종, 모든 민족이 다 같이 가진 공통의 특징이다. (365)
블랙 라이크 미Black Like Me, 1960/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하윤숙 역/살림 20090210 414쪽 16,000원
백인 남부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19)
11월 10일~12일
저들은 우리가 돈을 벌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는, 결국 수입이 없어서 세금을 많이 낼 수도 없게 하지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거의 모든 세금을 내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 저들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밀어놓고는 우리가 저 아래 뒤쳐저 있는 게 우리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85)
11월 14일
"......우리가 사람의 가치 또는 무가치를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정의를 통해서다. 정의가 없다면 바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플라톤.' 이 말이 금언의 형태로 달리 표현된 것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공평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106)
내가 속한 백인들이 증오의 시선을 보낼 수 있고 사람들의 영혼을 시들게 할 수 있다는 점이 슬펐다. 또한 자기들이 키우는 가축에게는 주저 없이 권리를 인정해 주면서도 인간에게는 이 권리를 함부로 빼앗는 점이 슬프다. (133)
올바른 법보다는 편리한 법이나 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려는 경향이 남부 주 의회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148)
11월 15일
이스트의 표현을 빌면 남부 지역의 '더러운 치부(assdom)'에 해당하는 사실을 수집해 놓은 정말 방대한 자료였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가장 더러운 세력은 무식하게 떠드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앞장서서 법안 제안서의 '초안'과 선전내용을 작성해 주는 법률가들이었다. (152)
11월 21일
이번에도 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모든 백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것, 예를 들어 식사할 만한 곳,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화장실, 손 씻을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188)
11월 25일
내가 만난 흑인들은 두 가지를 두려워했다. 우선 그들 중 누군가 폭력 행위를 저질러서 이 때문에 백인 입에서 흑인은 권리를 누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라는 말이 나오고 흑인을 위험스런 상황을 빠뜨릴까 봐 두려워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흑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책임한 백인의 섬뜩한 조소, 교도소, 기존의 주어진 틀이었다. (225)
12월 1일
백인이든 흑인이든 나는 어디까지나 똑같은 나였다. 그러나 백인일 때에는 백인으로부터 형제 같은 따뜻한 웃음과 특권을 제공받고 대신 흑인에게서는 증오의 시선이나 아첨을 받았다. 그러다가 흑인이 되면 백인은 나를 잡동사니 더미에나 어울릴 법하 존재로 여기는 반면 흑인은 나를 매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233)
12월 7일
남부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신문은 심지어 대도시 일간지조차 매우 근시안적이고 비겁한 모습을 보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백인 시민 평의회와 KKK단의 기관지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줄 정도로 편파적인 선전 활동을 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책임을 다하는 신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정도다. (257)
12월 15일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겪은 일은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 일이 너무 가까운 때에 일어난 일이었고, 너무 마음이 쓰라렸다. (269)
1960년 6월 19일
남부 지역의 보통 백인은 이웃 눈에 비치는 것에 비해 훨씬 올바른 성향을 지녔고 흑인보다는 오히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를 더 두려워한다는 내 주장이 이를 통해 확인되었다. (301)
에필로그 1976년
《블랙 라이크 미》를 쓰기 위한 실험은 1959년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이뤄졌다. (...) 그 시절에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면 나치가 유대인을 억압했던 일이나 집단 수용소, 가스실 같은 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거칠게 항의했다. (311)
내가 가진 인간 개인의 자질을 보고 나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내 피부색을 보고 판단했다. (...) 백인은 흑인이 자신과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여긴다. (312)
1967년에 성냥불이 그어지고 화약고가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이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체제전복 세력의 음모라는 견해 속으로 숨어 버렸다. (338)
1979년
《블랙 라이크 미》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한 인간을 판단할 때 인간성 면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의 피부색이나 철학적으로 '우연한 일'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미친 상황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363)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 아파하고, 자신과 자기 아이들을 위한 인간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저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죽는, 이 모든 동일한 근본 문제에 똑같이 부딪힌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진리며, 모든 문화, 모든 인종, 모든 민족이 다 같이 가진 공통의 특징이다. (365)
블랙 라이크 미Black Like Me, 1960/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하윤숙 역/살림 20090210 414쪽 16,000원
저자 존 하워드 그리핀(1920~1980)의 개인사는 이제껏 보고 들었던 어떤 이보다도 파란만장하다. 1935년 15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가난한 유학을 떠난 그는 아프리카 학생과 함께 수업을 받으며 '고전 교육' 덕분에 무의식적인 차별의식이 남아 있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의과대학 장학생이 된 19살에 독일 부대에 징집된 원장을 대신하여 유대인을 구하는 지하운동을 하였고, 1941년 미 공군에 입대하여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 점령군과 싸웠다. 1945년 공습으로 시력에 손상을 입었고, 18개월 후에는 시각장애인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1946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간 그리핀은 1947년 수난일에 눈이 완전히 멀었고 그 후 10년 동안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
시각장애인이 된 그리핀은 1953년 엘리자베스 홀랜드와 결혼하여 아내 가족 소유의 농장 내 작은 집에서 아이 4명을 낳아 기르며 27년간의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여러 편의 소설을 썼고, 그중 포로노그래피에 대한 풍자소설 「일곱 천사가 사는 거리」라는 소설은 쓰인 지 40년 만인 2003년에 출간되기도 하였다.
1957년 1월 9일 그리핀의 눈에 어렴풋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처음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본 그리핀은 인근 수도원에서 묵상을 하며 서서히 시력을 다시 찾게 되었다. 시력을 잃고 살았던 10년 동안 장애인으로 겼은 열등과 편견은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정의를 인간의 권리로 요구한다는 동기를 키우게 됐다. 그 후 활발한 인권운동과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1959년에 시도한 흑인이 되어 남부를 여행한 《블랙 라이크 미》는 1961년 출판되었고, 검열이 부활했던 1970년대 중반에는 도서관에서 사라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금지 도서는 문학의 규범이 되었고 권장 도서로 꼽히게 되었다. 그리핀의 개인사만큼 인권과 평등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흑인으로 변장하고 남부를 여행했던 몇 주간의 일기는 흑인이 겪는 보이지 않는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아는 화려한 미국의 숨기고 싶은 불공정하고 비열한 사실은 그리핀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미완성이었다. 그들은 흑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대전환의 기회를 만들었지만 두고 볼 일이다.
요즘 우리 현실은 10%의 백인과 90%의 흑인으로 양극화된 나라에 사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흑인 여성이었다면 더 불행하고 처절하게 참혹했을 니그로 그리핀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보인다.
의과대학 장학생이 된 19살에 독일 부대에 징집된 원장을 대신하여 유대인을 구하는 지하운동을 하였고, 1941년 미 공군에 입대하여 솔로몬 제도에서 일본 점령군과 싸웠다. 1945년 공습으로 시력에 손상을 입었고, 18개월 후에는 시각장애인이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1946년 다시 프랑스로 건너간 그리핀은 1947년 수난일에 눈이 완전히 멀었고 그 후 10년 동안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간다.
시각장애인이 된 그리핀은 1953년 엘리자베스 홀랜드와 결혼하여 아내 가족 소유의 농장 내 작은 집에서 아이 4명을 낳아 기르며 27년간의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시각장애인으로 살면서 여러 편의 소설을 썼고, 그중 포로노그래피에 대한 풍자소설 「일곱 천사가 사는 거리」라는 소설은 쓰인 지 40년 만인 2003년에 출간되기도 하였다.
1957년 1월 9일 그리핀의 눈에 어렴풋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처음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본 그리핀은 인근 수도원에서 묵상을 하며 서서히 시력을 다시 찾게 되었다. 시력을 잃고 살았던 10년 동안 장애인으로 겼은 열등과 편견은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정의를 인간의 권리로 요구한다는 동기를 키우게 됐다. 그 후 활발한 인권운동과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1959년에 시도한 흑인이 되어 남부를 여행한 《블랙 라이크 미》는 1961년 출판되었고, 검열이 부활했던 1970년대 중반에는 도서관에서 사라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금지 도서는 문학의 규범이 되었고 권장 도서로 꼽히게 되었다. 그리핀의 개인사만큼 인권과 평등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흑인으로 변장하고 남부를 여행했던 몇 주간의 일기는 흑인이 겪는 보이지 않는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아는 화려한 미국의 숨기고 싶은 불공정하고 비열한 사실은 그리핀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미완성이었다. 그들은 흑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대전환의 기회를 만들었지만 두고 볼 일이다.
요즘 우리 현실은 10%의 백인과 90%의 흑인으로 양극화된 나라에 사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흑인 여성이었다면 더 불행하고 처절하게 참혹했을 니그로 그리핀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