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책임

역사와 책임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라도 좋으니까, 아니 원래 보수가 더 그런 거니까 역사 앞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리울 뿐이다. (42)
  • 자기들이 보수라고 자처하는 한국의 지배층들은 사실 보수가 아니다. 보수라면 응당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책임지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으니 한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 세력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맡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책임지지 않는 자는 보수의 자격이 없다. 현재 한국의 지배층은 가끔 사랑의 열매를 사주는 식의 자선을 베푸는 것 이외에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무엇을 희생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집단이다. (43)
  •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51)
  •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국가 기밀이 될 수 있다. 신문에 난 공지의 사실일지라도 국가 기밀이다 보니,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이고 짜장면은 싸고 맛있다는 것도 국가 기밀이 되었다. (89)
  •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마리'의 간첩이 나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들의 팀플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단 중앙정보부, 안기부만이 짜고 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받쳐주고, 검찰이 법률적으로 포장해주고, 판사가 고문당했다는 호소에도 바짓가랑이 들어보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조작의 한 부분을 맡아 팀플레이를 해가며 간첩을 만들었던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적발된 간첩들 중에서 현재의 국가 기밀 개념을 적용한다면 간첩죄로 유죄를 받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첩은 처음에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들 다 아는 걸 혼자 모르는 놈을 "저 자식 간첩 아냐"라고 손가락질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간첩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간첩보다, 누구나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간첩 잡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 (93)
  • 왜 학교에서는 제헌헌법을 가르치지 않고, 왜 수능 시험은 제헌헌법을 묻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제헌헌법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제헌헌법의 구절구절을 지금 들여다보면 죄다 빨갱이 소리이기 때문이다. 제헌헌법의 내용은 통합진보당의 강령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139)
  • 지금은 노동3권도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지만, 제헌헌법 18조는 노동3권이 아니라 노동4권을 보장했다. 노동3권에 더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를 보장했던 것이다. 네 번째 권리인 '이익분배 균점권'은 쉽게 풀이하면 기업에 이익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들이 그 이익을 나눠 먹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140)
  • 민주화의 산물인 헌법재판소가 민주주의 발전, 소수파 보호, 기본권의 신장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헌법재판소는 기득권의 옹호, 지배 체제의 유지를 위해 기능하고 있다. (175)
  • 옛 민주당 시절부터 민주당을 배회하는 하나의 유령이 있다. 그것은 중도 노선이다. 진보 표만 갖고는 이길 수 없으니 중도 표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게 들리는 말이지만, 역사적 경험도 현실도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준다. (236)
  • 대중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딱 하나 할 수 없는 게 있다. 7·30 재보선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한 이야기지만, 이길 의지가 없는 당을 이기게 할 재주는 없다. (246)
  • 노무현의 정치적 상속자일 수밖에 없는 그는 노무현이 남긴 부채에 대해 노무현 자신이 반성한 것만큼 처절한 반성을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은 태평성대의 민주국가 지도자로 아주 훌륭하겠다 싶지만, 지금 같은 난세에 박근혜 정권과 같은 지독한 집단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할 지도자로서 적합한 인물인가 하는 점에서 여전히 회의적이다. (248)
  • 무엇보다도 야당성을 회복해야 한다. 의석이 130석이나 되는 새정치민주연합에 없는 딱 한 가지가 야당성이다. 넘쳐났던 것은 우원식 의원이 지적한 대로 귀족주의였다.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등이 겹치며 너무 빨리 여당이 되다 보니, 일은 못 하고 야당성만 잃어버렸다. 민주 정권 10년에 대중들의 지형은 아주 넓어졌지만, 정작 정치판에 남은 사람들은 투쟁의 근육을 잃어버렸다. (249)
  • 10년 전을 돌아보라. 역사의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싸움의 의지를 다지고 싸움의 근육을 회복할지어다. (253)

역사와 책임/한홍구/한겨레출판 20150406 272쪽 12,000원

190시간이 넘는 사상 초유의 필리버스터를 비웃으며 테러방지법이 통과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국가정보원이 주도하여 처음 입법예고 됐지만 수많은 논란 속에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지 14년 4개월 만에 법제화가 됐단다. 필리버스터를 하는 야당에 박수를 보내다 무기력하게 끝내는 모습에서 역시 야당성이 퇴화했다는 걸 확인했다. 인권보다 총선을 우선하는 정당으로 보였다. 야당성을 회복하고 투쟁의 근육을 되찾으려면 아직 멀었다.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간첩의 역사가 곧 조작의 역사였다. 아비는 모르면 간첩이라는 시대를 만들었고, 딸은 너도 테러범이라는 시대를 만들었다. '고문과 조작을 일삼은 자들의 행적을 담은 《독재인명사전》을 보고 싶다.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간 대통령과 세월호 참사에 책임지지 않은 사람들도 그 사전에 기록되길 앙망한다.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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