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나의 닻이다
- 지금까지의 한국시가 신발 신고 발바닥 긁는 시늉을 한 것이었다면 혹은 구두 위로 발등을 긁어대는 소리였다면 이제 누군가 신발을 벗고 맨발을 긁어줄 시인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맨살을 긁어주는 시인 그 시원함을 주는 게 바로 김수영 시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66)
- 그처럼 전쟁과 분단시대를 겪어내고 살아 돌아온 자만이 명확하고 섬세한 일상의 비참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103)
- 김수영에게는 가난이 가장 당면한 문제였던 것 같다. 원고료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번역을 하고, 월평을 쓰고, 라디오 원고를 쓰고, 어느 기간엔 양계를 생업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면서 '매문(賣文)'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했다.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판다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며 스스로의 글쓰기에 대해 못 마땅해하는 것은 비단 그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135)
- 잘 빗어진 항아리류의, 약간 촌스러운 운율이 노래처럼 흘러 다니는 구조적으로 매끄러운 시 또는 현학적인 해석의 여지만 잔뜩 있는 어지러운 말로 된 번역시들 사이에서, 벽돌 쌓듯이 언어를 쌓아 현실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가는 김수영의 시는 한마디로 어른의 문학이었다. (174)
- 1980년대를 사람들은 '시의 시대'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불리는 시대 속에서 나 역시 시집을 사서 읽었다. 신동엽과 김지하와 신경림을 알게 되었고 김준태도 읽었고 정희성도 읽었고 황지우도 읽었고 김정환도 읽었고 이성복도 읽었고 김남주도 읽었지만, 이런 몰랐던 시인들이 내 마음속에 쉽게 진입해 언어의 움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영이라는 망치가 유신이 세워놓은 시적 가건물을 산산조각 내고 훤한 빈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93)
- 문학은 때로 미묘하게 세상을 가르는데 김수영도 그렇다. 세상에 두 종류의 감수성이 있다면, 한편엔 십대에 김수영을 읽은 쪽이, 다른 편엔 그렇지 못한 쪽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203)
- 몸부림도 칠 줄 모르는 지식인, 식자층이 아닌, 무수한 반동들에게서 거대한 역사의 뿌리를 발견해내던 김수영에게 한국시사는 빚진 바가 많다. (234)
-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 진지하게라는 말은 가볍게 쓸 수 없는 말이다. 나의 연상에서는 진지란 침묵으로 통한다. (247)
- 김수영이 말한 정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다른 무언가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희망이라든가 역사의 진보 같은 것. 정직한 목소리가 만든 문화만이 희망과 진보를 회피하지 않는다. 나는 김수영으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273)
시는 나의 닻이다/염무웅 외/창비 20181214 304쪽 15,000원
김수영 50주기 헌정 산문집이다. '시는 나의 닻이다'는 시인의 좌우명이다.
그는 너무 일찍 떠났고,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그는 너무 일찍 떠났고,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