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죽 이야기

혼자 있을 때 아프면 슬픕니다. 입맛도 없지만 끼니를 때우려면 참 귀찮습니다. 죽이라도 먹고 싶은데 찬밥이랑 라면밖에 없으면 난감합니다. 이럴 때 라죽이 딱입니다.

라면 봉지를 뜯기 전에 잘게 부숩니다. 찬밥 반공기와 부순 라면을 냄비에 넣습니다. 수프 절반을 뿌려줍니다. 물을 간당간당하게 붓고 불을 지핍니다. 끓기 시작하면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줍니다. 물이 부족하면 조금씩 더 부으며 눌지 않게 저어주다 라면이 푹 익으면 라죽이 완성됐습니다. 싱거우면 수프나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됩니다. 양 조절에 실패해서 남으면 다음 끼니때 물을 조금 더 붓고 데워 먹어도 됩니다. 김치를 잘게 썰어 같이 끓이면 김치죽이 됩니다. 의외로 먹을만합니다.

라죽은 스무 살 때 처음 먹었습니다. 우럭회와 매운탕을 안주 삼아 술을 진탕 먹고 친구네 자취방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전날 동전 한 닢까지 털었던지라 나가서 사 먹을 형편이 되질 않았습니다. 친구는 밥솥을 열더니 남은 밥에 라면을 부숴 넣고 물을 붓더니 취사 버튼을 눌렀습니다. 김이 나자 솥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휘휘 젓고는 아침을 먹자고 합니다. 이런 걸 어떻게 먹느냐고 투덜대면서 한술 떴는데 맛있습니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라죽이라고 하더군요. 밥솥을 바닥까지 허겁지겁 긁어먹었습니다. 삼십여 년이 지나도 첫 라죽 맛은 강렬해서 잊히지 않습니다.

음식은 추억으로 먹는다지요. 요즘도 그때 생각이 나서 가끔 멀쩡할 때 해먹기도 합니다. 그 친구가 어렵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보탠다고 티가 날 형편이 아니라 더 안쓰럽습니다. 아프지나 말길 빕니다. 훗날 라죽에 쐬주를 마시며 지금을 추억하는 시절이 바삐 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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