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민주주의

Post Democracy, 2004
  • 포스트민주주의 모델 하에서도 선거는 분명 존재하고 정부를 교체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의 공적 논쟁은 설득 기술에 능란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경쟁적 선거 운동 본부에 의해 치밀하게 통제된 스펙터클일 뿐이며, 이런 선거 운동 본부에 의해 취사선택된 협소한 쟁점들만 고려에 넣는다. 시민 대중은 수동적이고, 조용하고 심지어 냉담한 역할을 할 뿐이며, 그저 그들에게 주어진 신호에 반응할 뿐이다. 선거 게임이라는 이 호화로운 구경거리의 수면 아래에서, 선출된 정부와 기업 이익을 압도적으로 대변하는 엘리트들 간의 상호 작용을 통해 진짜 정치가 만들어진다. (7)
  • 정치가 포스트민주주의적으로 바뀌고 있다면 정치적 좌파는 20세기에 성취했던 것 중 대부분이 뒤집히는 듯한 경험을 할 것이다. 20세기에 좌파는, 때로는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진보를 통해서, 때로는 폭력과 억압에 맞서,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국사에 반영되도록 투쟁했다. (8)
  • 1980년대 말이 되자 금융 시장의 세계적인 규제 완화로 인해, 경제의 역동성에 대한 강조점은 대량 소비에서 주식 거래로 바뀌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먼저 주주 가치 극대화가 경제적 성공이 주된 지표가 됐다. 곧 다른 나라들이 이를 열정적으로 모방하면서 따라갔다. 주식 보유자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이해관계자들에 관한 논쟁은 사그라졌다. (17)
  •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적 개념은 곧 제한된 정부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경제로 등치됐고, 민주주의를 선거의 실시로 축소·환원시켜버렸다. (19)
  • 오늘날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사상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이 정치 체제를 작동시키는 두 요소가 서로 구별된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데 대체로 평등한 능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다. 자유주의는 정치적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자유롭고 다양하며 광범위한 기회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27)
  • 국가가 보통 사람의 삶에 무언가를 제공해 주는 일로부터 물러나면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 더 무관심하게 되고, 그러면 기업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젖을 짜주는 국가라는 젖소를 민중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더 쉽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사태의 더 정확한 팔악일 것이다. (31)
  • 우리가 오직 두 개념, 즉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 개념만 갖고 있다면 민주주의의 건강에 대한 논의를 그리 진전시킬 수 없을 것이다. 포스트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민주주의 시기 이후 지루함, 좌절, 환멸이 발생한 상황, 강력한 소수 집단이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수인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정치 계급이 대중의 요구를 관리하고 조작할 줄 알게 된 상황, 하향식 공공 캠페인을 진행하여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을 기술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같은 상황은 비민주주의의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의 포물선을 따라 도달하게 된 현 시기를 묘사해준다. (32)
  • 여론을 조작하는 기법과 정치를 감시하도록 열어두는 기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해진 반면, 정당 정책안의 내용과, 정당 간 경쟁의 성격은 그 어느 때보다 진부하고 활기가 없다. 이런 종류의 정치를 비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조작되고, 수동적이며 공공 사안에 거의 참여하지 않는 축소된 역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5)
  • 노동조합은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국가 기능은 야경 국가의 성격으로 두드러지게 회귀했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있다.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었다. 정치가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 이익이 공공 정책으로 둔갑한다. 가난한 사람은 점차 정치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게 됐고 심지어 투표도 하지 않게 됐다. 이로써 그들은 민주주의 이전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차지해야 했던 위치, 즉 정치 참여가 배제된 위치로 자발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37)
  •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다. (47)
  • 자본은 가고 싶은 곳에 아무런 제약 없이 갈 수 있다는 이미지는 신기하게도 좌우파가 공유하고 있는 현실 왜곡이다. 좌파는 기업 이익이 통제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그 이미지를 이용한다. 우파는 기업이 넌더리내는 노동 규제와 과세의 모든 수단을 배척하기 위해 그 이미지를 이용한다. (57)
  • 새 지배 계급은 사회가 점점 더 불평등해짐에 따라 사회 경제적 권력과 부를 더 많이 가지게 됐을 뿐만 아니라 특권적인 정치적 역할마저 획득했다. 이것이 21세기 초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이다. (84)
  • 사회 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대 정치의 교의 자체가 포스트민주주의의 징후다. 비민주적인 사회에서는, 특권 계급은 오히려 자랑스럽고 오만하게 자신의 모습을 전면에 드러내고 피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종속된 상태를 인정하도록 요구받는다. 민주주의는 피지배 계급의 이름으로 계급 특권에 도전한다. 포스트민주주의는 특권이나 종속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89)
  • 시민은 민영화가 되면 서비스 공급에 대해 더 이상 정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정부는 이미 그 일을 민간 업자에게 넘겨줘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공사업 자체가 포스트민주주의적인 것이 됐다. 즉 정부는 민중에 대해, 큰 정책 방향에 관해서는 책임지지만, 그 정책의 세부 시행에 관해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167)
  • 민주적 선거가, 시민의 권리를 가장 소리 높여 표명하는 장이 아니라 제품 판매에나 쓰이는 조작적 기법에 공공연히 기반을 둔 마케팅 캠페인으로 변질되는 결말 말이다. (170)
  • 현대 정치가 포스트민주주의를 향해 냉혹하게 미끄러져 가는 것을 멈추기 위한 실천은 여전히 가능하고, 다음의 세 가지 수준에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업 엘리트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제어하는 정책, 둘째, 정치적 관행 자체를 개혁하는 정책, 셋째, 현 상황을 바꾸는 데 관심 있는 시민들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행동. (173)
  • 커져만 가는 기업의 정치적 권력은, 포스트민주주의의 진행 이면에 놓여 있는 근본적인 변화의 원동력이다. (174)
  •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에게 적절하고 강건한 접근법은 바로 정당이 시민들에게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쓸 때에는 지지를 계속 보내는 보상을 주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지지를 철회하여 처벌을 가하는 것임을 평등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188)
  • 노동조합은 주류 정치 체제의 이런 잠재력에 경각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노동조합은 대단히 어려운 위치에 서 있다. 이는 노동조합이 직업 구조의 변화로 인해 코너에 몰리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도 노동조합이 제대로 선택만 한다면, 덫을 피할 수 있는 전략정 행동이 가능하다. (190)
  • 누군가를 민주주의자로서 환영하는 것과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자로서 진정으로 지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일이다. (194)
  • 포스트민주주의는 공공성과 보편적 복지를 파괴하는 절차적 민주주의, 오직 "기업 로비를 통해서만 사회의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정치 계급의 탄생과 시민 대중의 수동화, 정치적 소통의 상업화와 미디어 기업의 영향력 증대, 노조의 영향력 사실과 탈정치화한 사회 운종 등 복합적인 현상에 관한 서술적 개념이다. (207)

포스트 민주주의Post Democracy, 2004/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이한 역/미지북스 20081205 250쪽 14,000원

전문을 다 옮기고 싶은 내용입니다. 초판은 2004년에 출간되었고, 이명박 당선 후에 번역되어 출판됐습니다. 초판을 읽었으면 예언서가 됐겠지만, 이명박이 먼저 읽고 행동 매뉴얼로 활용했을 것 같은 내용입니다. 지금은 큰 비용을 치른 사고 보고서로 읽힙니다.

김상봉 교수의 추천사가 정곡을 찌릅니다. "도둑맞은 물건처럼 민주주의를 얻어내면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독재자를 몰아냈더니, 이번에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덧1. 2020년 2월 19일 서울고등법원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등 혐의로 기소된 이명박 항소심에서 징역 17년과 벌금 130억원, 추징금 57억8천여만원을 선고했다. 다시 구속된 것은 지난해 3월 6일 보석으로 석방된 지 350일 만이다.

덧2. 2020년 10월 29일 대법원은 횡령, 뇌물 등의 혐의로 이명박에게 징역 17년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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