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선진국

눈 떠보니 선진국
  • 한국은 세계 최고의 후발추격국이었다. 한국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미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았다.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베낄 것이 있었고, 선진국의 앞선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단지 '어떻게'뿐이었다. 정답은 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왜'라고 물어본 적 없이 수십 년을 '어떻게'를 풀며 여기까지 왔다. (15)
  •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다. 앞보다 뒤에 훨씬 많은 나라가 있는 상태, 베낄 선례가 점점 줄어들 때 선진국이 된다. '세상의 변화가 이렇게 빠른데 어떻게 토론을 하는 데 2년이나 쓰나?'라는 생각이 떠올를 수 있다. 독일이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을 들여 낸 백서를, 화들짝 놀라서 교과서처럼 읽고 베낀 게 4년 전이다. 독일은 2년이나 시간을 들였지만, 우리보다 4년이 빨랐다. 긴 호흡으로 멀리 본 결과다. (21)
  • 선진국이 되기까지 지독하게 달려왔다. 바람처럼 내달린 몸이 뒤쫓아오는 영혼을 기다려줄 때다. 해결해야 할 '문화지체'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다. 무턱대고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기 전에 '무엇'과 '왜'를 물어야 한다. 언제나 문제를 정의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36)
  • 인적 자본과 물적 자본에 더해, 한 사회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게 바로 '신뢰자본'이다. 선진국과 중진국을 가르는 결정적인 '절대반지'.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을 아주 편리하게 하는 대신에, 발각된 무임승차자에게는 엄벌을 내림으로써 우리는 이 반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42)
  • 문법은 태생적으로 '규칙으로서의 법'이라기보다는 '사후적 정리로서의 구분'이다. (...) 한글 문법도 마찬가지여서 엄격한 법이 될 순 없다. 문법은 늘 사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용을 저해하는 지나치게 엄격한 문법과 띄어쓰기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이 된다. 사후적 통계가 어느샌가 까다로운 법으로 바뀌어서 언어의 사용을 방해한다는 게 대체 어떤 점에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띄어쓰기는 문장이나 단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면 되고, 표기도 가능한 실제로 사용하는 말 그대로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58)
  • 안전장치를 갖추는 것, 신호수를 두는 것, 하청으로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것, 모두 돈이 드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그렇게 투자를 하게 하는 대신, 사고가 났을 때 448만원으로 때울 수 있게 해 준다. 누가 더 많은 돈을 쓰려고 하겠는가. 이 시스템은 명백히, 그냥 싸게 사람을 죽이라는 지령이다. (66)
  • 물은 땅이 생긴 모양을 따라 흐른다. 물을 붙잡고 설득을 하고, 교화를 하고, 친하게 지내자고 술을 사준들 물이 계곡을 벗어나 산꼭대기로 흐를 리는 없다. 물이 오게 하고 싶으면 원하는 곳으로 물길을 파면 된다. (72)
  • 역사의 어디쯤에선가 우리가 원할 때 "이제 그만 충분하다"라고 속도를 늦추고, 멈춰 쉴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225)

눈 떠보니 선진국/박태웅/한빛비즈 20210801 226쪽 16,500원

광복을 두고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흘러 눈을 떠보니 선진국이 되어 있었다. 해방과 마찬가지로 선진국도 준비 없이 맞이했다. 해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정의를 내릴 줄 아는 것이 선진국의 시작이라면 사상을 만드는 곳이 선진국의 완성이다.

선진국도 잠깐, 눈 떠보니 미사일이 빽도하는 시절이 됐다. 지금은 도약과 추락을 가르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잠깐 선진국이었던 시절이 윤석열차 덕분에 일장춘몽이 될 지경이다.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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