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잉크
- 보이지 않는 잉크는 이를 알아보는 독자가 발견하기 전까지 행간에 그리고 행의 안팎에 숨어 있는 것이다. '알아보는' 독자라고 하는 이유는 책에 따라서 모든 독자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어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책을 최선의 방식으로 혹은 알맞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할 수 있다. 그 책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바로 보이지 않는 잉크에 민감한 사람이다. (19)
- 작가가 하는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기억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책임은 (시대가 어떻든) 세상을 바꾸는 일, 자신의 시대를 더 낫게 만드는 일이다. 그게 너무 야심에 차 보인다면, 세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일이다.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20억 인구가 한 가지 방법으로만 세상을 이해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96)
-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는 말들도 과거를 가리키는 접두사를 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시대, 포스트냉전 등등. 이 시대의 예언들은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뒤를 돌아본다. (106)
- 나는 때 지난 관념이 되어버린 진보의 징후를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진보는 단일한 공산주의 국가의 파괴된 미래와 함께 사라졌다. 자유롭고 무제한적이며 진보적인 자본주의의 벗겨진 가면과 함께 사라졌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고의적인 빈민화와 함께 사라졌다. 음경 중심적인 '국가주의'에 대한 믿음과 함께 사라졌다. 실상 독일이 첫 처형실을 가동했을 때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합법화하고 피를 흡수하기에는 너무 엷은 먼지 속에서 아이들에게 총을 난사했을 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웃 나라의 공동묘지 위로 국경을 그린 수많은 나라들의 역사 속에서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시민들의 뼈에서 흘러나온 영양분으로 정원과 초원을 비옥하게 했을 때, 여성들과 아이들의 등골 위로 건축물을 올렸을 때. 정말 나는 진보에는 아무 흥미도 없다. 나는 시간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 (114)
-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대한 사건은 기술이 아니라 인구의 대대적인 이동입니다. 시작은 세계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인류의 강제 이동, 즉 노예제도였습니다. 이 이동의 결과는 뒤이은 모든 전쟁을 결정했고, 여기에는 현재 모든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포함됩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하는 일은 인류의 끊임없는 이동을 단속하고 관련 정책을 만들고 관리하려는 시도입니다. (152)
- 노예제도의 기원도 그렇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인종차별인 것도 아닙니다. 신세계 노예제도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끈질긴 인종차별로 전환했다는 점입니다. (187)
-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지면과 방송 뉴스에서 인종을 밝히는 것이 꼭 그렇게 중요할까요? 둘째, 인종을 밝히는 것이 꼭 필요하다면 왜 인종을 강조하는 순간 오히려 인종이 가려지고 왜곡되곤 할까요? (317)
- (...) 사회가 할 수 없지만 언론이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 우리를 참여민주주의로 더 가까이 데려가주길 바랍니다. 거짓 경험과 살아 있는 경험을 구별할 수 있도록, 마주침과 참여, 테마와 현실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랍니다. 21세기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 모두가 알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길 바랍니다. (325)
- 우리는 인간이다. 세 살짜리도 알 수 있는 것을 이미 깨달았어야 하는 인간이다. (...) 지구상의 도덕적인 주민은 바로 우리다. (336)
- 부의 윤리는 시민의 의무를 역설합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할 때, 우리는 우리 각자의 선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367)
- 만약 과학의 언어가 더 윤리적인 삶이 아니라 더 길어진 수명만 주장한다면, 만약 정치적 의제가 남의 가족을 재앙으로 여겨 그에 맞서고, 소수의 자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이방인에 대한 혐오라면, 만약 종교의 언어가 종교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로 의심받는다면, 만약 세속적 언어가 신성함에 대한 경외에 굴레를 씌운다면, 만약 시장의 언어가 단지 탐욕을 부추기기 위한 구실이라면, 만약 지식의 미래가 지혜가 아닌 '업그레이드'라면, 우리는 어디서 인류의 미래를 찾을 수 있을까요? (379)
- 우리는 이미 우리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인간만이 이 은하계의 도덕적 주민입니다. 그 장엄한 임무를 맡기 위해 자궁 속에서 그렇게 애를 써놓고 왜 이제 와서 내버리려고 합니까? (...) 여러분에게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자비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시간이 있습니다. (402)
- 기억은(능동적으로 기억하는 행위는) 의도적인 창작의 일종이다. 과거에 정말 어땠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조사다. 기억의 목적은 그 대상이 나타난 방식과 그런 방식으로 나타난 이유를 곱씹는 데 있다. (481)
보이지 않는 잉크The Source of Self-Regard, 2019/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이다희 역/바다출판사 20210129 512쪽 18,500원
1993년에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19310218~20190805)이 한 연설, 강연, 발표, 기록을 모은 책입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뼈저리게 겪었지만, 우리가 아는 한 인간만이 지구와 은하계의 도덕적 주민임을 역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