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

On Disobedience: 'Why Freedom Means Saying No to Power, 1981
  • 수 세기에 걸쳐 군주, 성직자, 봉건 영주, 산업계 거물, 부모들은 복종이 미덕이고 불복종은 악덕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기 위해 이 입장의 맞은편에 다음의 언명을 놓아보자. 인간의 역사는 불복종의 행위로 시작되었으며 복종의 행위로 종말을 고하게 될지 모른다. (9)
  • 계속해서 인간은 불복종의 행동을 통해 진화해왔다. 양심과 신념의 이름으로 권력자에게 감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인간의 영적 발달이 가능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지적 발달 또한 불복종을 감행할 수 있는 역량에 달려 있었다. (...) 불복종의 역량이 인간 역사의 시발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면, 앞에서 말했듯 복종은 인간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 요인이 될지 모른다. (11)
  • 어떤 사람이 오로지 복종만 할 수 있고 불복종은 할 수 없다면 그는 노예다. 오로지 불복종만 할 수 있고 복종은 할 수 없다면 그는 반항꾼이다. 혁명가와 반항꾼은 다르다. 반항꾼은 분노와 실망, 억울함에 추동되어 행동할 뿐 신념이나 원칙의 이름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13)
  • 불복종하는 것, 권력자에게 감히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 까닭이 또 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복종은 미덕과, 불복종은 악덕과 동일시되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기간 동안 소수가 다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18)
  • 역사의 현 시점에, 의심하고 비판하고 불복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냐 문명의 종말이냐를 가를 모든 것일지 모른다. (20)
  • 사상(꼭 새로운 사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을 설파하면서 동시에 그 사상을 몸소 살아내는 사람을 예언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5)
  • 현실을 보여주고 대안들을 보여주고 저항의 목소리를 밝히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이다. 큰 소리로 외쳐 사람들을 반쯤 잠든 관습적인 상태에서 깨우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이다. 누군가를 예언자로 만드는 것은 역사적인 상황이지 예언자가 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아니다. (26)
  • 대부분의 사회체제에서 복종은 최고의 미덕이고 불복종은 최고의 최악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문화에서 누군가가 '죄의식'을 느낄 때, 사실 그는 불복종한 데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도덕적인 고뇌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겪는 괴로움은 도덕적 고뇌가 아니라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데서 오는 걱정이다. (31)
  •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복종의 행위로 종말을 고하게 될지 모른다. ‘국가의 주권,’ ‘민족의 명예,’ ‘군사적 승리’와 같은 낡은 물신에 복종하는 권위자들이 자신과 자신이 숭배하는 물신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명령에, 절멸의 버튼을 누르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행위로 말이다. (...) 불복종은 무언가에 맞서 이뤄지는 행위라기보다 무언가를 향해 이뤄지는 행위다. 볼 수 있는 능력, 본 것을 말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보지 않은 것을 말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35)
  •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물질적으로는 인간을 풍요롭게 해 주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빈곤하게 만들었다. (64)
  • 공산 사회에서 독재 정권을 '인민의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자유기업 사회에서는 같은 진영에 속한 동맹국이기만 하다면 독재자들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68)
  • 20세기 자본주의는 이전의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어떤 용어를 쓰든 옛 자본주의와 새 자본주의 사이에는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자본주의는 사물(자본)을 삶(노동)보다 우위에 둔다. 권력은 행동이 아니라 소유에서 나온다. (70)
  • 사회주의의 목적은 획일성이 아니라 개인성이었다. 물질적 목적이 삶의 주요 관심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삶이 해방되게 하는 것이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조작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사이에 완전한 유대를 일구는 것이었다. (74)
  • 사회주의에서는 빈곤만이 아니라 부도 악덕이다. 물질적 빈곤은 인간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토대를 박탈한다. 물질적 부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타락시킨다. (...) 자본주의는 체제 자체의 논리에 의해 물질적인 부의 계속적인 증대를 목표로 한다. 반면 사회주의는 인간의 생산성, 생명력, 행복의 계속적인 증대를 목표로 하며 물질적인 안락은 인간적인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한 만큼만 사용되게 하고자 한다. (75)
  • 사회주의는 자신이 대체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정신에 굴복했다. 사회주의의 추종자와 적 모두가 사회주의를 인간 해방을 위한 운동으로 보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여건 향상을 위한 운동으로만 생각했다.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목적은 잊혔거나 립서비스만 남았고,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강조점은 경제적 이들이라는 목적으로만 집중되었다. (76)
  • 민주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회주의, 즉 원래의 사회주의 원칙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공해줄 수 있다. (80)
  • 사회주의의 초고 원리는 인간이 사물보다, 생명이 재산보다, 따라서 노동이 자본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 권력이 소유가 아니라 창조를 따라야 한다는 것, 인간이 상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84)
  • 사회주의적 산업주의에서는 경제적 생산성이 아니라 인간적 생산성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달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노동과 여가 모두에서 인간이 자신의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이 그에게 유의미하고 흥미로운 방식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 방식은 지적, 정서적, 예술적인 역량을 포함해 그의 인간적인 역량 모두의 발달을 돕고 자극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86)
  • 사회주의는 개인이 사용을 위해 보유하는 사유재산을 철폐하지 않는다. 소득을 완전히 평준화하자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소득은 노력 및 재능과 연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득의 차이가 누군가의 삶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공유되지 못해 완전히 낯선 것이 될 만큼의 간극을 만들 정도로 막대한 물질적 삶의 차이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91)
  • 인종 간, 성별 간의 완전한 평등은 사회주의에서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평등은 동질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각 인종과 민족 집단의 고유한 재능과 능력이 온전하게 발달될 수 있게 허용하는 것도 평등에 포함된다. 양성간에도 마찬가지다. (95)
  • 사회주의는 사회 경제적·정치적 프로그램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프로그램이며 인본주의의 이상을 산업사회의 조건에서 실현하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근본적이어야 한다. 근본적이 된다 함은 철저히 뿌리에 도달한다는 의미이며 그 뿌리는 인간이다. (106)

불복종에 관하여On Disobedience, 1981/에리히 프롬Erich Fromm/김승진 역/마농지 20200630 116쪽 11,000원

20세기 사상가인 에리히 프롬이 1960년대에 쓴 에세이 네 편을 엮은 책이다. 「인류여 번성하라」와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1960년 미국 사회당 강령의 초안 격으로 썼지만, 당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곱씹어봐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과 지향점을 배울 수 있다.

"신은 멸망시키려는 존재를 눈부터 멀게 만든다는 격언이 있는데, 어쩌면 그 격언을 입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72)"는 구절이 섬뜩한 예언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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