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녀자 - 탄생과 굴절의 70년사

북한 녀자 - 탄생과 굴절의 70년사
  • 사회에서 탈북 여성을 만나면 두 번 놀라게 된다. 한 번은 강한 자기주장과 억척같은 생활력에, 또 한 번은 가정이나 지역으로 돌아갔을 때 보이는 그 순종적인 모습에 말이다. 일할 때에는 억척스럽고, 남편이나 국가 앞에서는 순종적인 모순된 태도의 연원은 어디일까? 북한 여성들은 대체 어떠한 삶을 살아왔기에 오늘날과 같은 역설적인 존재가 되었을까? 이 글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의 또 다른 반쪽에 대한, 오래됐으나 아무도 속 시원히 답해 주지 않은 의문에서 출발했다. (5)
  • 북한 정권은 '혁신적 노동자-혁명적 어머니'라는 생산 및 재생산 영역을 아우르는 젠더 전략을 수행하였다. 이 이중노동은 경제적 위기로 인한 생활 세계의 침식 상황에서 북한 여성을 능동적 행위주체로 드러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7)
  • 지난 20여 년간 선군정치를 고수한 북한 정권은 체제 존속을 위해 북한 주민의 '성적 정체성sexunality'을 군사주의 정책에 따라 구성했다. (...) 선군시대 북한 체제에서 남성은 전방의 전사로, 여성은 후방의 전사로 살아야 하는 젠더정책이 강제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군사주의 권력이 병영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젠더 위계가 극명해졌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전체를 젠더 위계적인 군사적 남성지배 담론에 종속시켜 양성 불평등한 사회체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강제했다. (118)
  • 해방 후 북한의 인구구성은 직업적으론 농민이, 성별로는 여성이 다수였다. 역사 속에서 여성은 물리적으로는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론 언제나 '소수자'였으며, 권력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었다. 여성은 권력의 지반을 지탱하고 있었으나, 농업문화에 기반한 배타적이고 대규모적인 혈연 공동체 질서 하에서 정치경제적 지위를 점하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여성이 해당 공동체를 관리 및 유지하는 생활관리자였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권력자는 남성과 노인이었으며, 여성과 어린이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72)
  • 사회주의 근대화 실현을 위한 혁신적 여성 노동자상과 함께, 정권이 북한 여성들에게 요구한 여성상은 '혁명적 어머니상'이었다. 이는 가정 내 여성 역할의 재구성과 직결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북한 여성은 농업 생산에 기초한 대가족 관리자에서 근대적 핵가족 관리자로 재구성되었다. 이 관리자에게 주어진 또 다른 임무는, 사회주의적 근대의 정신 아래 규율화된 '사회주의적 인간'을 생산하고 양육하는 '혁명적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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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녀자/박영자/앨피 20170330 640쪽 28,000원

북한 여성은 정권이 요구한 혁신적 노동자와 혁명적 어머니 역할을 동시에 해냈습니다. 한국전쟁 중에는 각종 생산 활동에 동원되어 남성 부재 사회를 유지하는 후방전투를 담당했습니다. 전방의 남성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노인과 어린이의 삶을 지켜야 했습니다. 전장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공장에 동원됐고 농촌 여성들은 폭격을 피해 야간작업을 했습니다. 파괴된 현장을 복구하고 전시 물자 생산을 지속하는 노동 주체로서 후방전투를 책임졌습니다. 북한 여성은 전쟁을 통해 정권이 요구하는 '혁신적 노동자-혁명적 어머니'라는 이중역할론으로 여성을 주체화시켰습니다.

전쟁 이후 중공업을 우선한 북한의 산업화 정책은 경공업을 중공업 아래에 두는 생산 부문 위계를 만들었습니다. 중공업 공장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가 경공업과 지방산업보다 높았습니다. 북한 중공업 공장노동자는 다수가 청장년 남성이었고, 경공업이나 지방공업, 농업 노동자는 여성이 다수였습니다. 생산 부문의 위계는 노동자 간 위계에도 반영되어 노동 분야에서 성별에 따른 위계가 제도화됐습니다. 북한 여성의 사회경제활동은 급격히 증가했으나 여성정책은 보수화되어 정치사회적 지위는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노동자와 어머니라는 이중역할을 동시에 요구받았던 여성들은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1995년부터 시작한 북한의 선군정치는 2000년대 김정일 정권의 생존 전략으로 더욱 구조화되어 북한 체제를 병영화했습니다. 일상화된 전쟁 준비는 남성은 국가 보위를, 여성은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주체로 젠더 역할이 구성하며 군사주의 젠더 시스템을 강화시켰습니다. 1990년대 중후반에 자연재해와 국제적 고립이 겹치자 기초 생활 유지를 책임지는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강한 생활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북한 여성들은 "달리는 여맹, 앉아 있는 당, 서 있는 사로청"1이라고 비아냥댔습니다. 여기서 생존전쟁의 전사가 된 북한 여성 특유의 '이악함'이 드러납니다.

'이악하다'라는 말은 '악착스럽다'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의미는 훨씬 강합니다. 국가권력의 요구와 가족 생존을 위해 북한 여성들은 생존투쟁을 전개하며 '고난의 행군'을 견뎠습니다. 생존 문제를 자력갱생으로 해결하는 주체가 여성에게 맡겨진 역할이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경제난 이후 현재까지도 가정을 중심으로 여성이 움직이면 먹고살고 여성이 가만있으면 굶어죽는 상황입니다.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며 가정주부들을 중심으로 노동력 감축(구조조정)을 했습니다. 이들은 부업 활동으로 사적 자본을 축적하고 장사와 무역에 나섰습니다. 농촌 여성들은 텃밭 경작과 가축을 기르며 얻은 생산물을 장마당에 내다 팔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북한 여성은 자생적 시장 주체로 성장했습니다. 북한 여성들의 '이악함'은 경제난 이후 국가권력과 남성이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는 군사주의 젠더 상황에서 생존전쟁의 전사가 된 여성들에게 나타난 안타까운 결과물입니다. 김정은 시대도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북한 녀자》는 북한 체제와 젠더사를 연구하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에서 시작해서 15년 이상 연구한 학술서이지만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북한 여성들의 생존 능력을 통한 생활력을 이해하는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다루고 있습니다. 북한 여성은 노동자성과 모성의 이중역할이나 가족을 위한 생존 활동으로 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북한 여성에게 요구하는 이악함은 시대와 사회를 넘어 이념과 체제도 형태를 달리하며 강요하고 있음을 배웁니다.


  1. 여맹(조선민주여성동맹)은 타 단체에 속하지 않은 만 31~55세의 북한 여성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대중조직으로, 여기서는 1995년 경제난 이후 매매를 위해 시장에 나서는 일반 여성들을 대표한다. 한편 사로청(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은 '청년·학생·직장인·군인' 등으로 구성된 북한 사회에서 주로 남성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당(조선로동당)은 권력층을 대표하는 조직이다.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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