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Gegen den Hass, 2016
  • 그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유령도, 영화 속 등장인물도 아니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그림자가 생기며, 길을 막아설 수도, 시야를 가릴 수도 있는 육체를 지닌 존재. (31)
  • 무슬림에 대해서는 이중적 관용이 적용되는데, 이는 흔히 무슬림들이 여기에 사는 것은 괜찮지만 이슬람교를 종교로 갖는 것은 탐탁지 않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의 자유란 꼭 집어 기독교에게만 인정되는 개념인 모양이다. (21)
  • 요즘에는 적대감을 과시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에 이른바 공적인 의미, 심지어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에 편승해 내면의 모든 천박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문명인이라 할 수 없다. (22)
  •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23)
  • 증오의 표적이 되거나 목격자가 되면 우리는 대개 간담이 서늘해져 입을 다물어버리기 일쑤이고, 쉽게 겁먹고 기가 죽거나, 포악함과 공포에 대처할 방법을 몰라 자신이 무방비 상태라고 느껴 마비된 것 같은 상태가 되어 공포 앞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런 것이 증오가 가진 힘이다. (24)
  • 증오와 폭력을 고찰할 때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도 함께 고찰해야 한다. 이 말은 증오와 폭력이 번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전 정당화와 사후 동의의 과정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사례들에서 증오나 폭력에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다양한 원천을 고찰한다는 것은, 증오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며 엄연한 사실에 근거한다는 잘못된 통념에 맞서는 일이다. 그 통념은 증오가 마치 존경심처럼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진짜 감정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우연하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26)
  • 걱정에 도사린 위험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처럼 오히려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 (56)
  • 분노에는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고 표명되는 특정한 맥락이 있다. 증오의 근거로 언급되는 이유들, 어떤 집단이 증오해야 '마땅하다'며 갖다 대는 이유들은 누군가가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틀 안에서 산출해낸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들이 성향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 반복해 거론하고 설명하고 묘사해야 한다. (...) 강렬하고 열렬한 증오는 오랫동안 냉철하게 버려온, 심지어 세대를 넘어 전해온 관습과 신념의 결과물이다. "집단적인 증오와 멸시 성향이 생겨나려면 (중략) 사회적으로 증오와 멸시를 당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회에 피해나 위험이나 위협을 가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 (76)
  • 어쩌면 폭력과 위협이라는 수단은 지지하지 않더라도 분출된 증오가 향하는 대상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은밀하게 묵인하지 않았다면, 증오는 결코 그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을 증오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증오를 방조한다. (92)
  • 종교가 다르거나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거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은 마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림자도 생기지 않는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되고 무시되는 곳들이, 상규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은 바닥에 밀쳐 쓰러뜨리는 곳, 아무도 그가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지 않는 곳,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곳, 뭔가 다르다고 괴물 같은 존재로 취급하는 모든 곳, 바로 거기서 증오에의 공모가 일어난다. (94)
  • 국가나 지역이 각별한 권위를 부여하든, 종교공동체가 더 높은 정당성을 제공하든, 또는 민족이 자신들의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든, 그렇게 확증된 '우리'의 자기 묘사에는 동질성, 본원성, 순수성 중 적어도 한 가지 요소는 반드시 등장한다. (138)
  • 증오와 폭력은 그 자체만 따로 떼어 비난하기보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들을 함께 고찰해야 한다. (...) 증오와 폭력을 무턱대고 거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략과 은유와 이미지를 가지고 증오를 만들어내며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는지 관찰하면, 어느 지점을 치고 들어가야 그 이야기의 틀 자체를 전복할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197)
  • 증오를 이야기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그 증오를 돌리는 구조, 그리고 사전에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사후에는 폭력을 명예로운 것으로 기리는 담론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시각을 갖추면 시민사회의 책무와 행동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도 확장된다. (198)
  • 표준에서 벗어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까지 포함해 모든 개인의 자유는 바로 그 다양성 안에서만 꽃 필 수 있다. 오직 자유로운 공공의 영역 안에서만 모순과 자기회의가 들어설 여지, 그리고 모호함의 장르로서 아이러니가 들어설 여지가 유지될 수 있다. (212)
  •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순수하지 않은 것과 다른 것을 옹호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순수함과 단순함의 페티시즘에 사로잡힌 증오하는 자와 광신주의자가 가장 거슬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계몽된 의심과 아이러니의 문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엄숙주의적 광신주의자와 인종주의적 독단론자가 가장 못마땅해하는 사유의 풍토이기 때문이다. (219)
  • 한 사회가 스스로 본질주의적이고 동질적이고 '순수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약할수록, 구성원들이 동질적으로 뭉쳐야 한다는 압박도 적다는 것이다. (226)
  • 역사의 끔찍한 유산으로부터 미래지향적인 과제를 이끌어내는 기억만이 의미와 활기를 유지할 수 있다. 포용적인 사회, 어떤 개인이나 집단 전체를 '이방의' 존재 또는 '순수하지 않은' 존재로 구분해 배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늘 다시금 천명하는 기억의 문화만이 그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주도면밀하게 현재 작동하는 배제와 폭력의 기재들을 감시하는 기억행위만이 언젠가 그 기억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231)
  • 권력은 사실 그 누구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그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것이다. (...) 혼자서 '우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사람들이 분열할 때 사라진다. 증오에 저항하는 것, '우리'안에 한데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용기 있고 건설적이며 온화한 형태의 권력일 것이다. (250)

혐오사회Gegen den Hass, 2016/카롤린 엠케Carolin Emcke/정지인 역/다산초당 20170718 272쪽 15,000원

'혐오라는 문제를 다룰 때 늘 염두에 둘 것은 이 점이다. 그것이 외계에서 뚝 떨어진 괴물이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라는 것, 거기엔 자체의 역사와 사회적 배경이 반드시 선행한다는 것이다(11)'. '혐오와 증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차이를 본질적인 양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는 것이다.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불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하게 대우받았기 때문에 다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단지 혐오나 증오를 추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배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키워낸 불평등과 차별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16)'. 《88만원 세대》 저자인 박권일 작가의 추천사가 이 책을 압축한다.

「머리말」과 「순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찬미」만 읽어도 좋다. 권력은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흩어질 때 사라진다. 혐오와 증오, 멸시와 차별에 맞서지 않고 방관하는 것은 그런 행동을 계속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증오 공모자이다. 내가 그랬다.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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