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에 미국 버몬트 뉴헤이븐에서 칼빈 헐버트와 메리 우드워드 사이에서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헐버트의 아버지는 미들베리대학의 총장으로 회중교회 목사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다트머스대학 창립자의 증손녀였습니다. 외가에서 세운 대학을 졸업한 헐버트는 성직자가 되려고 유니언 신학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조선은 근대적 신식학교인 육영공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미국 측에 교사 3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헐버트에게 제안이 가자 즉시 수락했습니다.
헐버트와 벙커, 아내를 동반한 길모어는 1886년 7월 5일에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23살의 청년 헐버트가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육영공원育英公院을 개교했습니다. 강의는 대부분 영어로 했습니다. 헐버트는 도착한 지 열흘만인 1886년 7월 중순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사로 활동하며 1890년에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냈습니다. 재계약이 되지 않자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능숙한 한국어 실력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지만, 역으로 관리들의 방해와 불화로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육영공원은 1895년 4월에 문을 닫았습니다.
2년 뒤인 1893년 10월 1일, 감리교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선교사를 제안받았을 무렵 버나드대학 총장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포기하고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되어 1897년까지 운영하며 〈독립신문〉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영문판은 기사 작성과 편집인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배재학당, 한성사범학교에 이어 관립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활동에 쏟았습니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직후에는 언더우드, 에비슨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권총을 품고 불침번을 서기도 했습니다.
1903년에 헐버트는 조선왕조를 다룬 최초의 역사서 《대동기년大東紀年》을 상해에서 윤기진의 도움으로 한문으로 출간했습니다. YMCA 창립준비위원장과 창립총회 의장으로 10월에 YMCA가 공식 출발하는데 일조했습니다. YMCA는 독립협회 간부들과 개화 인물이 대거 들어와 국권회복을 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800쪽이 넘는 종합 역사서인 《The History of Korea한국사》 출간했고, 이듬해에 한국의 사회, 문화, 풍습 등을 집대성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의 종말》을 영문으로 펴냈습니다. 1908년에는 《대한력사》라는 한글로 된 역사서를 출간했습니다.
할버트는 한글을 배운 지 3년 만에 한글 교과서를 저술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전래민요와 아리랑을 근대적 악보로 채록했습니다. 구전하던 아리랑에 역사상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인 것입니다. 1905년에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글을 사랑했던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맞춤법과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습니다. 헐버트는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국에 관한 글과 논문을 국내외에 많이 발표했습니다. 서구 사회에 거의 알리지 않았거나 왜곡되었던 한국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1905년 헐버트는 고종 황제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고종의 친서 전달을 지연시키며 을사늑약이 공표될 때까지 고의로 시간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되지만, 회의가 1년 뒤로 연기되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1907년 4월 20일자 날짜가 적힌 특사 임명장을 받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인 특사가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을 만나 특사증과 친서를 숨겨서 궁궐 밖으로 나왔습니다. 1907년 5월 8일, 다시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출발했습니다. 헐버트가 이준보다 늦게 서울을 출발한 것은 일본의 감시가 자신에게 집중하게 함으로써 한국인 특사들이 의심받지 않은 채 헤이그로 향하게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1907년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한 한국인 특사들은 한국 독립문제 지원을 호소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헐버트는 유럽의 여러 곳을 돌며 언론인들을 교섭하여 한국의 처지를 알렸습니다. 이상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한 헐버트는 뉴욕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준 특사는 울분을 토하면서 1907년 7월 14일에 순국하였습니다. 이준 열사의 순국 직전에 헤이그를 떠난 헐버트는 7월 19일에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헐버트는 미국의 여론을 대상으로 일본의 침략 부당성과 미국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며 한국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1909년 8월에 헐버트는 가사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헐버트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황제 내탕금을 찾아 훗날 독립을 위해 쓰라며 위임장을 전달했습니다. 이 무렵 미국에 있는 딸이 급성 뇌종양으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고종의 예치금 문제 해결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상하이로 향했습니다. 독일 공사관의 주선으로 덕화은행에 예치한 510,000마르크는 이미 일본이 서류를 조작해서 인출해 간 뒤였습니다.
미국에 돌아온 헐버트는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문제에 관한 대중강연을 하며 신문기고를 했습니다. 헐버트는 3·1운동 기념행사 때마다 주요 강사로 참석해 한국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한민족을 격려하였습니다. 1923년 말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순회강연을 130일간 실시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1924년 4월 초부터 대중연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한 순회강연은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었습니다. 60대 초반이 된 헐버트에게 미국 전역을 돌며 하루 2차례씩이나 강연을 한다는 것은 소화하기 힘든 강행군이었습니다. 헐버트는 저술 활동에 매진하며 1940년대 초반까지 한국 독립을 위한 미국 사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연설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886년 23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고, 1909년에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1949년 7월 29일에 헐버트는 다시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빈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헐버트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환영식과 특강을 모두 취소하고 병원에 입원했지만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1949년 8월 5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헐버트는 한평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헐버트의 장례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영결식은 8월 11일 오후 2시부터 엄숙하게 거행됐습니다. 헐버트는 그가 즐겨 찾았던 마포나루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0126~19490805)는 평생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던 말처럼 독립한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고, 마침내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에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1999년 8월 5일, 50년 동안 묘비명이 비어 있던 헐버트 묘비에 김대중 대통령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을 새겼습니다.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3·1절에 일장기를 내걸고, 유관순 관련 수업을 '반일교육가스라이팅'이라며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는 세상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만, 윤석열 정권이 대놓고 저지르는 작태로 인해 진심을 숨겼던 토착왜구가 이때다 싶어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습니다. 헐버트 박사에게는 한없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늦었지만 합정역을 헐버트역으로 바꿔 늘 기억해야만 합니다.
헐버트/김권정/역사공간 20151230 212쪽 13,000원
덧. 오탈자
덧. 역사채널e - 호머 헐버트의 진실
덧. 다큐온 - 헐버트가 전하는 기쁜 소식
헐버트와 벙커, 아내를 동반한 길모어는 1886년 7월 5일에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23살의 청년 헐버트가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육영공원育英公院을 개교했습니다. 강의는 대부분 영어로 했습니다. 헐버트는 도착한 지 열흘만인 1886년 7월 중순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사로 활동하며 1890년에 최초의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펴냈습니다. 재계약이 되지 않자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능숙한 한국어 실력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았지만, 역으로 관리들의 방해와 불화로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육영공원은 1895년 4월에 문을 닫았습니다.
2년 뒤인 1893년 10월 1일, 감리교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습니다. 선교사를 제안받았을 무렵 버나드대학 총장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포기하고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되어 1897년까지 운영하며 〈독립신문〉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영문판은 기사 작성과 편집인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배재학당, 한성사범학교에 이어 관립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대부분의 시간을 교육활동에 쏟았습니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직후에는 언더우드, 에비슨 등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권총을 품고 불침번을 서기도 했습니다.
1903년에 헐버트는 조선왕조를 다룬 최초의 역사서 《대동기년大東紀年》을 상해에서 윤기진의 도움으로 한문으로 출간했습니다. YMCA 창립준비위원장과 창립총회 의장으로 10월에 YMCA가 공식 출발하는데 일조했습니다. YMCA는 독립협회 간부들과 개화 인물이 대거 들어와 국권회복을 위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800쪽이 넘는 종합 역사서인 《The History of Korea한국사》 출간했고, 이듬해에 한국의 사회, 문화, 풍습 등을 집대성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의 종말》을 영문으로 펴냈습니다. 1908년에는 《대한력사》라는 한글로 된 역사서를 출간했습니다.
할버트는 한글을 배운 지 3년 만에 한글 교과서를 저술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1896년에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전래민요와 아리랑을 근대적 악보로 채록했습니다. 구전하던 아리랑에 역사상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인 것입니다. 1905년에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한글을 사랑했던 헐버트는 주시경과 함께 맞춤법과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습니다. 헐버트는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한국에 관한 글과 논문을 국내외에 많이 발표했습니다. 서구 사회에 거의 알리지 않았거나 왜곡되었던 한국 문화에 대한 재발견이었습니다.
1905년 헐버트는 고종 황제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고종의 친서 전달을 지연시키며 을사늑약이 공표될 때까지 고의로 시간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906년 6월 22일에 헐버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되지만, 회의가 1년 뒤로 연기되었습니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1907년 4월 20일자 날짜가 적힌 특사 임명장을 받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인 특사가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을 만나 특사증과 친서를 숨겨서 궁궐 밖으로 나왔습니다. 1907년 5월 8일, 다시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며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출발했습니다. 헐버트가 이준보다 늦게 서울을 출발한 것은 일본의 감시가 자신에게 집중하게 함으로써 한국인 특사들이 의심받지 않은 채 헤이그로 향하게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1907년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한 한국인 특사들은 한국 독립문제 지원을 호소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헐버트는 유럽의 여러 곳을 돌며 언론인들을 교섭하여 한국의 처지를 알렸습니다. 이상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한 헐버트는 뉴욕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이준 특사는 울분을 토하면서 1907년 7월 14일에 순국하였습니다. 이준 열사의 순국 직전에 헤이그를 떠난 헐버트는 7월 19일에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헐버트는 미국의 여론을 대상으로 일본의 침략 부당성과 미국 정부의 입장을 비판하며 한국 독립을 호소했습니다.
1909년 8월에 헐버트는 가사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헐버트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황제 내탕금을 찾아 훗날 독립을 위해 쓰라며 위임장을 전달했습니다. 이 무렵 미국에 있는 딸이 급성 뇌종양으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고종의 예치금 문제 해결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상하이로 향했습니다. 독일 공사관의 주선으로 덕화은행에 예치한 510,000마르크는 이미 일본이 서류를 조작해서 인출해 간 뒤였습니다.
미국에 돌아온 헐버트는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문제에 관한 대중강연을 하며 신문기고를 했습니다. 헐버트는 3·1운동 기념행사 때마다 주요 강사로 참석해 한국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한민족을 격려하였습니다. 1923년 말 태평양 연안 지역에서 순회강연을 130일간 실시한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1924년 4월 초부터 대중연설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의욕적으로 시작한 순회강연은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되었습니다. 60대 초반이 된 헐버트에게 미국 전역을 돌며 하루 2차례씩이나 강연을 한다는 것은 소화하기 힘든 강행군이었습니다. 헐버트는 저술 활동에 매진하며 1940년대 초반까지 한국 독립을 위한 미국 사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한 연설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886년 23세의 나이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고, 1909년에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1949년 7월 29일에 헐버트는 다시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빈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헐버트는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환영식과 특강을 모두 취소하고 병원에 입원했지만 위독한 상태였습니다. 1949년 8월 5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헐버트는 한평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미소를 머금으며 눈을 감았습니다. 헐버트의 장례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영결식은 8월 11일 오후 2시부터 엄숙하게 거행됐습니다. 헐버트는 그가 즐겨 찾았던 마포나루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0126~19490805)는 평생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던 말처럼 독립한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고, 마침내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에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1999년 8월 5일, 50년 동안 묘비명이 비어 있던 헐버트 묘비에 김대중 대통령이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묘비명을 새겼습니다.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3·1절에 일장기를 내걸고, 유관순 관련 수업을 '반일교육가스라이팅'이라며 학부모가 민원을 제기하는 세상입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만, 윤석열 정권이 대놓고 저지르는 작태로 인해 진심을 숨겼던 토착왜구가 이때다 싶어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습니다. 헐버트 박사에게는 한없이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늦었지만 합정역을 헐버트역으로 바꿔 늘 기억해야만 합니다.
헐버트/김권정/역사공간 20151230 212쪽 13,000원
덧. 오탈자
- 32쪽 11행 1881년 7월 5일 → 1886년 7월 5일
- 164쪽 국내 이상재가 국내에 들어와서 → 이상재가 국내에 들어와서
덧. 역사채널e - 호머 헐버트의 진실
덧. 다큐온 - 헐버트가 전하는 기쁜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