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하나의 팩트만이 부유한다면, '그때 그 시절 덕택에' 집집마다 자동차 굴리는 것 아니냐는 사람이 등장한다. 군부독재를 긍정하고 나아가 일제강점기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놀라운 사람이 이 땅에 있는 이유다. (16)
  • 행복과 노력을 결부시키면 위험하다. 특히, 사회가 흔들릴 때의 이런 조합은 '넘어진 사람'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부메랑에 불과하다. 다수의 비극이 소수의 희극에 덮이면 되겠는가. 우리는 결코 공평하게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불행은 가장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의 삶부터 야금야금 씹어 먹는 굉장히 정직한 녀석이다. (37)
  • 자본주의적 시점에선 신의 한 수였다. 불안한 일자리 형태를 많이 만들수록, 노동자들끼리 다툰다는 예측은 완벽했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을(정규직)에게 갑(기업)이 괜찮은 보수를 지급하면, 사람들은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았다'면서 알아서 박수치고 선망한다. 그러면 노동자들 사이에는 공정이란 단어로 포장된 벽이 생겨 을은 결코 섞여서는 안 될 병, 정, 무로 철저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자신이 을 정도는 되리라 희망하는 취업 준비생들은 병, 정, 무의 요구를 마치 자신의 자리를 뺏는 것처럼 느끼며 분노한다. (46)
  • 불평등을 '줄이는' 안목을 키워주는 교육을 고민하지 않고, 불평등에서 '벗어나는' 묘수만을 나열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파할 사람은 다름 아닌 교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순응하고, 구체적인 절망을 파괴하는 것을 체념한 학생들은 어설픈 희망의 빛에 매료되어 대학의 서열화를 신봉하며, 가족 모두의 힘을 빌려 피 말리는 입시경쟁에 매진할 것이다. (87)
  • 시험의 공정성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개선되고 있을 뿐이지 절대적일 수 없기에 그 결과로 타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당연한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 교육 시스템에 길들여지면, 논리적으로 사람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한다. 논리적인 혐오라니 끔찍하다. (...) 시험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 노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사람마다 동등하게 주어질 리 없으니 우리는 '공부의 결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려는 버릇을 경계해야 한다. (92)
  • 본질, 순수 등의 고상한 단어로 포장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비판하는 내용에만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자본주의를 자연적 질서처럼 가르치는 교과내용은 문제 삼지 않지만, 이를 비판하면 정치적인 사람이 된다. 성장은 절대 규율이지만, 분배는 정치적 선동이다. (...) 지금껏 성차별에 둔감하고 동성애를 공공연하게 혐오했던 수많은 정치적 교사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성평등을 주장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부르짖었던 또 다른 정치적 학생들은 온갖 혐오에 노출되었다. (104)
  • 꼰대란 극도의 자기중심성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사람이다. 최근에 막무가내로 나답게만 살라는 식의 가치관이 자존감을 지키는 법이랍시고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한데, 여기에 도취된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다. (152)
  • 자신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의 평균치를 멋대로 상향 조정해서는 안 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자'는 것은 오늘만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겐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다. (157)
  • 집이 있느냐 없느냐가 윤리와 도덕의 경계가 되어, 한쪽이 반대쪽의 인생을 멋대로 평가해도 된다는 천박한 자신감이 사람의 타고난 성향일 리 없다. 사회가 병들면 개인이 병든다는 명제에 대한 완벽한 증명이 아니겠는가. 불로소득이란 이래서 문제다. 사람을 건방지게 만들고, 그게 건방인 줄 모르게 하는 재주까지 있다. '영혼을 끌어모았으니' 사회가 보일 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이것이 사회문제가 아니면 무엇인가. (178)
  • 침대를 놓을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자 잠도 줄여가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마흔에 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여덟 시간이나 넘게 잔다는 것이 타인에게 '게으르게' 비쳐질 수 있음을 두려워했다. 가난한 사람다움을 인정받으려는 내게 숙면은 감히 사치였다. (197)
  •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은 이러한 지친 개인의 생애 과정조차 경쟁적으로 전시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개인의 서사를 더 안쓰럽게 포장할수록 효과가 좋다. '고통 경쟁'의 종착지는 끔찍하다. '내가 더 힘들다! 너는 이런 삶을 모르지?'라는 분위기에 길들여지면 어떤 노동자가 노조 활동을 하려다 회사의 탄압을 받는 모습을 봐도 심장이 송곳으로 찔리는 그런 아픔까지는 느끼지 않는다. '나도' 그 정도 무게의 고충은 있다고 여기기에. (207)
  •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았다'는 성명서가 종종 등장합니다. 그러면 집단지성일까요? 인종차별에 둔감하고, 성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불평등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의견을 모으면 '차별하자!'는 무서운 결론이 도출되지요. (210)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오찬호/위즈덤하우스 20201012 222쪽 15,000원

차별은 분리를 낳고, 분리는 계급을 낳고, 계급은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차별은 분리를 낳고...... 오찬호 작가의 글은 주기적으로 읽어야 한다. 무뎌진 생각과 비뚤어지진 시선을 깨우치는 각성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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