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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언어가 판을 친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변혁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거짓 언어로는 현상을 파악할 수 없고, 현상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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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본원적인 힘이며,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숨은 지배자다. 불안은 인간을 길들이고, 소진시키며, 예속시킨다. 불안은 비인간적인 체제를 유지시키고 강화하며, 변혁을 차단하고 저지한다. 불안은 무한 경쟁의 논리 속에서 심화되고 일상화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안은 생명을 죽인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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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는 우리 사회가 가장 결여하고 있는 품성인 것 같다. 인간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너무도 모자란다. 특히 사회적 약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감정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비인간적, 비인격적 대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난생처음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에게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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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네 개의 체제를 기축으로 작동해 왔다. 첫째는 정치 영역의 '수구-보수 과두 지배체제'이고, 둘째는 경제 영역의 '재벌 독재 체제'이며, 셋째는 사회 영역의 '권위주의 체제'이고, 넷째는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체제'이다. 바로 이 네 요소로 구성된 '구체제'가 이 나라를 '헬조선', '절망사회'로 만든 주범이다. 촛불의 외침은 바로 이 구체제를 변혁하라는 것이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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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통해 지배하는 자는 일상의 미시권력이다. 그들은 공론장의 거시권력보다 힘이 세다. '박근혜 시위'에서 볼 수 없었던 가면이 '조양호 시위'에서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통령은 내놓고 비판할 수 있어도, 시장은 그럴 수 없다. 광장의 거시권력보다 일상의 미시권력이 더 무서운 것이다. 힘겹게 쟁취한 정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사회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한 이유다.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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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철저한 과거 청산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한 사회로 나아간 반면, 대한민국은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친일의 과거, 냉전 반공주의의 과거, 군사 독재의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세력이 개헌, 선거법 개정, 한반도 평화 등 정부의 개혁 정책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는 현실은 과거 청산이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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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대는 젊은 시절 목숨을 걸고 파시즘의 야만과 싸운 세대이다. 이 위대함이 일상에서 이들의 한계가 되었다.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라는 브레히트의 예리한 통찰처럼, 86세대는 밖으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 안으로는 파시즘을 키웠다. 이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꼰대론'의 연원이다.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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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친구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어요. 어딜 가든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는 거예요. 처음엔 무척 당황했어요.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지요. 내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사실 말이에요.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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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공동체는 모두 함께 가는 공동체이다. 내 자식만 출발선에서 한 발짝 앞세우려는 욕망은 공동체에 해를 입힌다. '자식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기적 욕심 때문에 학교를 무한 경쟁의 정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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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를 옹호하는 기관이라면, 이 땅에서 대학은 죽었다. 진리는 실용에 자리를 빼앗겼고, 정의는 실리에 무릎을 꿇었다.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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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한국 대학은 대학의 본질을 훼손당하며 자본 권력에 자원(인적자원), 기술(특허), 이데올로기(기업 담론)를 제공하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대학 평가는 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자본이 활용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였다. 재벌 언론이 자본의 입맛에 맞춰 만든 지표에 따라 대학을 평가하였고, 대학은 이런 평가를 거부하기는커녕 이들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경쟁적으로 자신을 '개혁'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자본에 예속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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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보수화는 이미 짧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한국 대학은 정치 민주화가 쟁취된 바로 그 순간부터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1987년 6·10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루 새로 등장한 직선 총장들이 '경영 총장'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군사 독재 시대의 '어용 정치 총장'이 물러난 자리를 '실용 경영 총장'이 차지한 것이다. 이는 '민주화'의 본질이 기실 군사 독재에서 자본 독재로의 이행에 불과함을 서늘하게 암시한다.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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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사의 최대 역설은 현대사의 역사적 고비마다 민주화의 선봉장이자 견인차였던 대학이 정작 자기 자신을 민주화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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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과두 지배 세력과 미래의 개혁 세력 사이에 있다. 야당은 한국 정치의 을이 아니라 영원한 갑이다. 여야의 차이는 권력을 6대4로 분점한 갑인가, 4대6으로 분점한 갑인가의 차이일 뿐이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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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역사의 진실을 두려워하고, 민족의 이념을 도외시하는 보수는 없다. '역사'와 '민족'은 보수의 핵심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보수'라고 불리는 집단은 사실은 보수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는 '수구'이다. (...) 한국 보수의 비극은 진짜 보수가 '암살'당한 자리를 수구가 꿰차고 앉아 보수를 참칭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가치가 실현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수구가 현대사를 지배해 온 결과 한국의 정치 지형은 연쇄적으로 왜곡되었다. 수구가 '보수'를 자처하고 나서자, 보수가 '진보'라고 불리게 되었고, 또 진보는 '급진'이라고 불려온 것이다.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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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독일과 한국 의회만 비교해 보아도 우편향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현재 독일 연방의회 의원 630명 중에서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는 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반면 여의도에 있는 300명의 국회의원 중 295명이-최소한 당의 정강에 따르면-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한다. 나머지 5명은 정의당 의원이다. 이런 형편이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적 불평등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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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방송이 민주주의의 적이 된 이유는 자명하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성숙한 인간의 사회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체제"(아도르노)인데, 한국의 방송은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기는커녕 국민의 미성숙 상태를 영속화하려는 조직으로 퇴화했기 때문이다.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랴.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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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것은 정치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구도'의 문제다. 냉전체제와 수구-보수 과두 지배에 의해 극단적으로 우경화된 정치 구도가 문제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좋은 보수'로서 오른쪽으로는 수구의 생존공간을 좁히고, 왼쪽으로는 진보의 활동공간을 열어주어, 평화시대에 걸맞은 정의로운 정치 구도를 창출해야 한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역사적 책무이며, 선거법 개정은 그 실천의 첫걸음이다.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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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소신투표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했다. 1등만을 뽑는 단순 소선거구제에서 내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몇 차례 최악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차악으로는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제 '차악 투표' 시대는 끝나야 한다. 국민에게 신념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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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좌파 정당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황교안이 보기엔 좌파 정당이고, 심상정이 보기엔 우파 정당이다. 독일의 보수당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시각에서 본다면 민주당은 보수적인 우파 정당이다.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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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는 한국인의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사재기도 패닉도 없는 의연한 시민들의 모습에 세계가 경탄하고 있다. 시민들의 품격 있는 행동은 정치인들의 저열한 행태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이러한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숙한 시민이 비루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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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동북아가 처해 있는 위기의 본질은 '일본의 과거', '한반도의 현재', '중국의 미래'에 있는바, 일본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와 한반도의 분단 현실, 중국의 미래 패권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야만 동북아 평화체제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고, 독일은 동북아가 안고 있는 과거청산, 분단, 패권주의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세계 유일의 국가이기 때문에 동북아 평화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한·중·일 3국이 공동 연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나라라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290)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김누리/해냄 20211018 320쪽 16,500원
김누리 교수가 박근혜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는 2013년에서 2020년까지 쓴 칼럼을 모아 정리한 책. 집필 당시와 시차가 존재하는데도 변한 것이 없다. 그 원인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민낯에 대한 진단, 과거 청산의 중요성과 진보, 보수에 대한 해석은 명쾌하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그런데도 희망을 설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