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 발전의 단순한 귀결로 오는 게 아니다. 또한 그것은, 자본주의는 그대로 둔 채 (흔히 선거철마다 그렇게 기대되듯) 관리자만 교체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스스로 만든 생산력, 하지만 그것을 더 좋은 용도로 투입하는 걸 용납도 않는 그 자본이 지닌 생산력을 "해방"시킨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다. 나아가, 공산주의나 혁명 또는 인간 해방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역사적 경향성 내지 필연성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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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사회 속 우리 삶의 토대란 무엇인가? 노동이 자본으로 전화하고 또 자본이 노동으로 전화하는, 일종의 영구운동이다. 즉 자본은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을 고용하여 생산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큰 자본을 만들어가고, 인간은 자신의 살아 있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의 몸집을 불려주는 대신 임금을 받아 소비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나날이 벌어지는 일들은, 인간의 산 노동living labor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 자본의 생산과정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가치 생산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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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오늘날 자본주의는 수백 년 전 초창기 때의 본질적 모습을 이제는 겉으로도 잘 드러낸다. 그 본질이란 마치 자기 자신을 삼키는 괴물의 모습,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기계의 모습, 나아가 장기적으로는 사회생활의 근거 자체를 소멸시키는 사회의 모습이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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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본주의를 자기 동력이 행하는 대로 내버려둔다면 결코 저절로 사회주의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폐허로만 남을 공산이 크다. 만일 자본주의라는 말이 어떤 의도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것은 인류의 마지막 단어가 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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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미 오래전에 "질서의 편"이기를 그만두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각종 "예술적" 저항을 얼마든지 자기 이익에 맞게 활용해, (질서가 아니라) 혼란(카오스)까지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 이른바 "대안" 교육, 확실한 양성 평등, "도덕성" 개념의 소멸 등 이 모든 변화조차 (사회 해방의 방향이 아니라) 일단 상품 형태로 변환되기만 하면 결국 자본주의에 이득을 안겨주게 된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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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상품생산은 처음부터 내적 모순이라 할 만한 것을 안고 있다. 그 자신의 토대 안에 강력한 시한폭탄 같은 걸 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노동력의 착취다. 이것이 없다면 자본은 정상적 작동도, 지속적 축적도 모두 불가능하다.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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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등장은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의 일탈 행동 같은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또한 그것은 "급진" 좌파들이 가끔 주장하듯 기세등등한 정치가들과의 공모 아래 벌어진 쿠데타 같은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위기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도록 만들기 위한 유일한 현실적 돌파구였다. 그리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금융 내지 신용 분야가 많은 기업과 개인들에게 번영이라는 환상을 종 더 심어주었으나 그 목발마저 결국 부러지고 말았다(2008년 가을의 미국발 금융위기와 그 이후 지금도 계속되는 전 세계적 혼란이 바로 그 증거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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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부채)은 달리 보면, 미래에 실현될 이윤을 미리 소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부채) 경제의 확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자기 한계에 이르는 시점을 어느 정도 연기할 수 있을 뿐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아무리 최첨단 의학 기술을 쓴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닥칠 죽음 자체를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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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삶의 모든 영역이 돈에 의존할 뿐 아니라 더 나쁘게도, 부채(신용)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우리 삶의 실질적 재생산이 완전히 "가상 자본"에만 의존하거나, 또 각종 사업체나 기관, 정부 조직 역시 신용등급에 의해서만 생존이 가능해진다면 금융위기가 올 때마다 증권 시장 참여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치명타를 입을 것이고, 여기에는 표면적 일상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가장 고요한 시공간까지 해당한다.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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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종말, 상품 판매의 종말, 자기 노동력 상품 판매의 종말, 그리고 상품 자체의 종말, 나아가 시장의 종말, 국가의 종말은 필시 매우 긴 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 범주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사회적 삶의 다양한 형태를 이런 범주들이 대체해온 것처럼 말이다. 이런 면에서 현재의 위기란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단지 이 장구한 과정의 한 중요한 단계일 뿐이다.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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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지구적으로 가치 생산의 지속적 감소가 관찰되고 있는데, 이 또한 나라를 불문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잉여 현상이 나타남을 암시한다. 즉,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착취할 가치조차 갖고 있지 않은 인구가 넘쳐나게 되었다. 요컨대 가치 증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그 자체가 일종의 과잉 내지 사치, 또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 요인, 즉 "잉여"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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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본이 정말로 '모든' 것을 가치형태(노동, 상품, 화폐 등)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아마도 이 성공은 바로 그 자신의 종말을 뜻할 것이다.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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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단지 국가, 시장, 법과 질서 등과 동일시되거나 또는 반대로 위법, 탈선 등과만 동일시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이 둘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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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구의 오존층에 구멍을 내는 주범이 바로 (자본주의) 산업사회라는 점을 누구나 잘 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인간 존재의 유일한 가능태인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거기서 빠져나갈 탈출구를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지경이다. 마치 절대적 파국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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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지난 200년 이상 자본주의는 늘 자기 몰락의 경행보다 약간 빠르게 움직임으로써 파국을 미연에 방지해왔다. 그 비법은 대체로 생산의 지속적 증대였다. 그러나 만일 가치가 증가하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든다면 이 경우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 생산이 더 늘다 보니) 자원 소비량이 증대하고 따라서 오염이나 자연 파괴 역시 증가하게 된다.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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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이론으로 처음 정립된 것은 17세기 말경이며, 그 후 항상 특정한 인간관 및 유별난 인류학을 견지해왔다. 경제인 모형,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인간관은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자연스러운 지점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문제다. 사실 오로지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이 인간상은 자본에 의해 수백 년간 계속된 폭력과 기만을 통해 민초들에게 강제로 주입된 가치관에 불과하다.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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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에게 여전히 어떤 의지가 있다면, 즉 문화가 경제에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예방하려는 의지가 있다면(실은 이런 소망이야 아직도 널리 공유된다)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무엇일까? 역시 향락 산업의 생산물과 (혹 있을 수 있는) "참된 문화"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인정이란 순수하게 상대적으로 보거나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질적으로 '다름'을 감지하는 판단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263)
파국이 온다
The Writing on the Wall/안젤름 야페
Anselm Jappe/강수돌 역/천년의상상 20211119 298쪽 18,000원
가치비판론자인 안젤름 야페가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발표한 열 편의 에세이 모음집. 이 책의 제목인 "재앙을 예고하는 대자보"만 읽어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본주의와 함께하는 "인류에게 인간 해방은 불확실한 반면 참사나 파국은 거의 확실히 예고되어 있다(29)"로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노예제나 봉건제가 있었듯이 자본주의는 쉽게 해체되지 않을 것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해법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수밖에 없다. 그 담대한 전환은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