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 세계 일주를 하던 나는 1894년 여름 일본을 떠나 미묘한 상황에 처해있던 조선으로 여행을 시도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남부 지방은 정부에 대한 봉기가 극심했고, 동아시아의 두 강대국인 일본과 중국은 조선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 전쟁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정치적·문화적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적기였다. (4)
  • 누군가 나에게 부산과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조선인의 비참한 생활은 그들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관리들이 도둑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애써 돈을 모아봐야 이들에게 강탈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생활비와 담뱃값 이상으로 돈을 벌 필요가 있겠는가? 실제로 푼돈이라도 남으면, 은밀한 곳에 숨기거나 땅에 묻는다. 부유한 상인들조차 이런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돈을 숨겼다가 발각되었는데도 바치기를 거부하면, 대부분 전 재산을 몰수당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도 그렇지만 낯선 이방인에게도 매우 정직하다. 절도와 강도는 비교적 드물며, 살인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5년간 전체 구역에서 살인은 두 건밖에 없었다. 살인자는 머리가 잘리는 처벌을 받았다. (24)
  • 조선 땅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알기 위해 이 나라를 찾은 여행자에게 부산은 엄청난 실망을 안겨준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과 아무런 연관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일본 도시이기 때문이다. (27)
  • 나중에 나는 부산보다 북쪽에 있는 도시들에서도, 조선인이 얼마나 게으르고 느려 터진 민족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건장한 체구의 조선 남자들은 모두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담배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담배 피우고 빈둥거리는 것이 남자들의 유일한 소일거리처럼 보였던 반면, 여자들은 집안과 마당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30)
  • 황해에 거주하는 세 인종이 이곳 제물포에서보다 더 첨예하게 마주치는 곳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제물포를 흥미롭게 만든다. 경주마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은 마구간이 아니라 경주로에서 내릴 수 있다. 제물포는 그러한 경주로이며, 유럽인은 관객이다. 소수이긴 해도 일본인은 그래도 제법 중국인과 조선인보다 앞서 있다. 그다음이 중국인이고, 조선인은 그 뒤를 마치 짐 끄는 말처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조선인들은 경기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당분간은 말이다. 언젠가 교역이 좀 더 확대되고 나라가 개방되어 이 나라의 낡은 문화의 폐허 속으로 현대적 삶이 들어올 경우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은 확실히 소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잿더미 속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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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94년 여름Korea: Eine Sommerreise nach dem Lande der Morgenruhe 1894, 1895/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Ernst von Hesse-Wartegg/정현규 역/책과함께 20120229 320쪽 15,000원

1894년 조선은 1월에 동학농민운동, 6월에는 갑오개혁, 8월에는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 남자들은 옹기종기 모여 담배 피우며 놀거나 잠을 자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반면 조선 여자들은 항상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능력한 왕실과 억압과 착취를 하는 관리들 등살에 푼돈이라도 있으면 여지없이 뺏겼기 때문이다. "넓은 지구상에서 조선만큼 백성이 가난하고 불행한 반면 지배층은 거짓되고 범죄적인 곳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109)"이라고 일갈했다.

공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 하찮은 여성이 죽기 직전의 비루한 조선을 그나마 연명시킨 근본으로 읽혔다. 이방인은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아주 훌륭한 본성이 들어 있다.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232)"이라고 희망섞인 전망을 했다. 백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조선땅을 밟은 저자의 모습이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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