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본다'니, 어떻게 하는 걸까? (13)
- 일반적으로 '색'은 시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얀색이니 갈색이니 파란색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시점에 개념적이기도 해요. 각각의 색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걸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그 특징적인 이미지로) 이해하고 있어요. (21)
- 애초에 나한테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평범한 거고, '보이는' 상태는 모르니까. 보이지 않아서 뭐가 큰일인지 실은 잘 몰라. (54)
- 나한테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평범한 거고 '보이는' 상태는 모르니까, '보이지 않으면 고생한다.'라는 말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몰랐어. (55)
- 그 무렵 나는 크게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시라토리 씨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품을 만질 수 있는 편이 좋을 거라든지 체험형 작품을 더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라토리 씨 본인은 만질 수 있는지 여부를 티끌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면이든, 영상 작품이든, 조각이든, 관심이 가면 "좋은데, 보고 싶어."라며 미소 지었다. (69)
- 시라토리 씨는 스무 살 무렵까지 빛은 보였다고 했다. 어릴 적에 시각을 잃었기 때문에 모양과 색 등 '시각의 기억'(시라토리 씨는 이렇게 부른다)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빛의 이미지만은 뇌리에 강렬히 새겨져 있다고. 그래서 소리와 빛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우리가 보는 것과 시라토리 씨가 그리는 이미지가 어느 정도 일치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76)
- 보이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게 있지 않느냐고 자주 듣는데. 그야 보이지 않아서 느끼는 게 있긴 해요.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까 느끼는 건, 보이니까 느끼는 것과 나란히 있는 동등한 관계라고 생각해요. 그 두 가지에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고 싶다니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맹인을 미화하는 게 아닐까 싶어. (77)
- 시라토리 씨가 원하는 것은 음악에 비유하면 CD에 녹음된 곡이 아니라 라이브 연주, 그것도 재즈의 즉흥 연주다. (108)
- 문제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을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커다란 분류로 뭉뚱그린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해도 선천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과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 실명한 사람은 살아오며 전혀 다른 경험을 했기에 머릿속에 축적된 정보량과 그 내용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사물을 본 경험이 극도로 적은 시라토리 씨가 '보는' 세계는 눈이 보이는 사람, 그리고 중도에 실명한 사람들과 같지 않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금 내가 눈앞에 두고 있는 컵을 시라토리 씨는 머릿속에서 같은 크기, 색, 형태로 재현하지 못한다. 그는 전혀 다른 상상력을 써서 컵을 '본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눈이 보이는 사람' 또한 시라토리 씨가 '보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39)
- 감상과 해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고, 그덕에 내 내면의 바다가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도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른다. (140)
- 실제로 그랬다. '눈이 보이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작품을 관람해보면, 자신의 고정관념과 착각을 자주 깨닫게 된다. 보통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방대한 시각 정보에 노출되며 생활하는데, 세세한 정보까지 전부 뇌에서 처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눈은 필요한 부분에 주목하여 필요한 정보만 취사선택한다. 그와 동시에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시야에 들어와도 뇌에서 처리하지 않는다. '선택적 주의'라고 불리는 일종의 인지적 편향이다. (153)
- 시라토리 씨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눈이 보이는 사람'의 경계선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편해졌고, 그 덕에 안락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던 거네. (174)
-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러면서 항상 '악'으로 치부해왔던 귀신이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고 상상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함께 작품을 보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한 걸음씩 뛰어넘으면,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획득한다. 그 결과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 따뜻한 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05)
- 장애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표현의 힘'이 있어요. 이곳에서는 장애 유무를 따지지 않고 함께 작품을 전시하고 관람하죠. 그런 경험이 오히려 '장애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계기를 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229)
- 평소에 생각했는데, 장애라는 건 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생겨나는 거야. 당사자한테는 장애가 있는지 없는지 상관없거든. 연구자나 행정 기관이 '장애인'을 만들어냈을 뿐인 거야. (243)
- 나도 맹학교에 다닐 때는 맹인답지 않은 것을 동경했거든. 예를 들어 전맹인 사람이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거침없이 다니거나 생선 가시를 깨끗하게 발라 먹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부러워했어. 그리고 그런 걸 못 하는 사람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그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맹인답지 않은 행동의 뿌리에 있었던 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비슷해지는 건 좋은 일'이라는 일종의 차별 의식과 우생 사상이었을지도 몰라. (312)
-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때껏 나는 시라토리 씨가 말로 하는 대화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작품 감상도 말만 들을 수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어도 '대부분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 이건 무척 큰 차이다. 그래, 이를테면 목소리. 인간이 내는 목소리란 단순히 말을 옮기는 수단이 아니다.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입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사람들 사이의 공기를 진동시키며 바람이 된다. 그 바람은 따뜻할 수도 차가울 수도 있다. 아니면 몸이 찌르르 저릴 수도 있다. 그런 물리적 변화까지 모두 아우른 것이 목소리고, 말이다. (324)
-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겐지라는 사람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수단이 미술관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시라토리 씨뿐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방법으로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고 있다. 일기를 쓰거나 SNS에 사진을 올리거나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갑자기 시라토리 씨가 사진을 찍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역시 '지금'이라는 시간에 책갈피를 끼워넣은 것이다. (325)
- 스물한 살까지 거의 맹학교에서 살아온 시라토리 씨. 그는 맹인 사회밖에 모르는 채 괜찮을까 의문을 품고 굳이 멀리 떨어진 아이치의 대학교로 진학했다. 틀림없이 시라토리 씨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손댈 수 없는 것, 나아가 볼 수 없는 것도 포함한 이 세상 전부를 자신의 감각으로 이리저리 만지작거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이라는 전맹인 사람과 가장 동떨어진 듯한 또 다른 세계로 일부러 건너가 최단 경로 안내 따위는 무시하고 모든 역에 정차하는 여행을 계속해왔다. (397)
- 처음에는 작품의 구석구석을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내 눈의 '해상도'가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와 내가 '서로가 서로를 위한 보조장치가 된것 같아서 재미있다.'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없는 기회이니 함께 더 작품을 보면 새로운 발견이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많은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시라토리 씨의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평소에는 안 보이는 것,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많은 것을 발견했다. (399)
- 이 세계에서 웃고 싶어요. (407)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目の見えない白鳥さんとア-トを見にいく, 2021/가와우치 아리오川內 有緖/김영현 역/다다서재 20231023 432쪽 22,000원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미술관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품을 만지거나 체험형 작품을 즐길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정작 전맹인 시라토리 씨는 작품에 관한 시각적 설명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감상합니다. 오히려 시라토리 씨의 질문으로 눈앞의 작품이 색다르게 보이거나 지나쳤던 부분이 새롭게 보입니다.
시라토리 씨가 '보는' 세계는 눈이 보이는 사람과 같지 않고, '눈이 보이는 사람' 또한 시라토리 씨가 '보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은 아니라 오히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눈이 필요한 정보만 취사선택하지만, 시라토리 씨는 작품을 설명하는 대화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분위기로 예술 작품을 감상합니다. 그와 함께 예술 작품을 보며 시라토리 씨의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평소에는 안보이는 것,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라토리 씨는 맹인답지 않은 것을 동경하며 '장애가 없는 사람과 비슷해지는 건 좋은 일', 보이지 않으면 고생한다는 말은 일종의 차별 의식과 우생 사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맹인답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사진도 찍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라토리 겐지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고 합니다.
시라토리 씨가 '보는' 세계는 눈이 보이는 사람과 같지 않고, '눈이 보이는 사람' 또한 시라토리 씨가 '보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이 같지 않다고 해서 상대방이 틀린 것은 아니라 오히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눈이 필요한 정보만 취사선택하지만, 시라토리 씨는 작품을 설명하는 대화뿐만 아니라 목소리와 분위기로 예술 작품을 감상합니다. 그와 함께 예술 작품을 보며 시라토리 씨의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평소에는 안보이는 것,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시라토리 씨는 맹인답지 않은 것을 동경하며 '장애가 없는 사람과 비슷해지는 건 좋은 일', 보이지 않으면 고생한다는 말은 일종의 차별 의식과 우생 사상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맹인답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사진도 찍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금의 자신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사라토리 겐지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함께 웃으며 살고 싶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