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일기 日記
  • 바이러스엔 "국경이 없"지만 "우편번호가 건강 상태를 결정"한다. 우리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는다. (15)
  • 9월에 책을 낸 이후 인터뷰 때문에 사람을 서너번 만났는데, 지난 일년간 뭘하며 지냈느냐는 질문을 매번 받았다. 2020년에 저는 창밖을 보며 지냈습니다. (26)
  • 2020년의 눈사람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29)
  • 봄비 내릴 때 책상 앞에 앉았는데 소설 한편을 마무리하고 나오니 낙엽이 떨어지는 때,라는 패턴으로 시간이 흐르는 일을 직업으로 택해 살다보니 나이를 띄엄띄엄 생각하거나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32)
  • 하지만 지금 사람들의 명은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조構造되는 것이다. (34)
  • 사람들이 전염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내가 병에 걸리는 경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겠지만 내가 매개가 되어 남을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고 믿는다. 이 걱정의 바탕은 자기가 남에게 병을 옮긴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고 우애일 수도 있다. (37)
  • 타인의 삶과 죽음을 자기 삶의 지표로 삼는 일에 나는 반대하고 있지만, 어떤 삶과 죽음은 분명 신호이자 메시지이고 그것을 신호이며 메시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삶은 늘 있다. 이때 발신자는 살거나 죽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사회다. (74)
  •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이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76)
  • 추운 곳에서는 아 씨발 춥다고 웅크리고 더운 곳에서는 씨발 덥다고 웅크린 채로 그런 장소를 이미 일상으로 겪는 삶과 그 삶을 그런 일상으로 내몬 사람들이며 구조構造를 생각했다. (100)
  • 세월호가 맹골수도에 가라앉은 뒤로 봄이 되면 진도를 향해 내려가는 길에 만개하는 벚꽃을 "쥐어 뜯어버리고 싶었다"던 유가족의 말을 생각했다. (102)
  • 사람 하는 일을 능력과 무능력으로 나눠 말하는 일을 가급적 피하고 싶지만 이런 '없음'엔 무능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다. 우린 종종 무능력해. 이 무능력의 원인은 무지일까, 기어코 모르겠다는 의지일까? (128)
  • 서울은 오랜 도시이고 그 오랜 과거를 끊임없이 벗겨내고 숨기고 밀어낸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엔 부끄러울수록, 참사이고 사건일수록 밀어내고 숨기고 치워버리려는 힘들이 있다. (132)
  • 세월호 침몰은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끝난 사건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도와 안산에서 전국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사건이므로 나는 산보하는 길에, 산보하는 길에도, 그 기억들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을 생각하고 다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133)
  •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도 늘어간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과 차마 용서를 청하지 못할 사람이 늘어가는 일이기도 한데 그건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나는 그게 괜찮다. (164)
  • 그러니까 백신 박탈감을 토로하는 인터뷰가 실린 기사 같은 걸 보면 마음이 상하지만 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의 입에 마이크가 닿았을 뿐이고, 전염병에 취약한 사람들이 먼저 백신을 맞도록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그런 말들로 전체를 전망하지는 않는다. (165)
  • 문학을 주어로 두지 않고 목적으로 두고 살아온 지난 시간 동안 문학을 나는 늘 좋아했고 그것이 내게는 늘 최선이었습니다. (197)

일기 日記/황정은/창비 20211018 204쪽 14,000원

세월호, 구로역, 차별과 혐오, 미투 그리고 코로나. 손수건을 스카프 삼아 목에 둘렀던 눈사람이 2020년에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창밖을 보며 지냈고요. 바이러스엔 국경이 없지만 우편번호가 건강 상태를 결정했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사랑이 천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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