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유죄 -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

아주 오래된 유죄 -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
  • 여성들의 싸움은 가끔 승리하지만, 많은 경우 여전히 패배한다. 법정 싸움은 포기하지 않은 여성들의 최후의 싸움이고, 승리의 기약도 없이 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싸움이다. (11)
  • 치마가 들춰지고, 마음대로 볼일도 못 보고, 남자아이들의 잘못으로 소문에 오르내려도 '행실 잘하라'며 오히려 혼나던 여자아이들이 자라나, 남자 사진을 촬영해 유포하거나 남자로부터 당한 일을 그대로 되갚자며 똑같이 하려고 하거나, 혹은 하고 있다. 이른바 '미러링'이다. 여자들이 미러링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내 눈에는 싫어하는 벌레가 온몸에 잔뜩 들러붙었는데 이를 떼어내지 못해 몸부림치는 고통으로 느껴진다. 내 눈에 미러링은 여성의 비명이다. (20)
  •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유발한 남성의 성적 충동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이는 종종 피해자의 행실 책임론으로 귀결되어 성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형을 감면받거나, 심지어 무죄를 받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야한 옷을 입어서' '평소 행실이 방정하지 못해서' '남성과 데이트를 즐기며 성관계를 허락한 것처럼 착각하게 해서' 등 여성이 남성의 성적 충동을 유발해 성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33)
  •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성희롱 피해 사실을 공개하더라도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2, 3차 가해는 당연한 부록이며, 결국에는 피해자 자신이 직장과 공동체에서 손가락질받고 쫓겨날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50)
  •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어른들의 책임은 어느새 성적 자기결정권, 즉 '자발'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아이들을 공격한다. 성인 남성의 성착취에 대해 법과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관대한가. 성인 남성의 성범죄 대상이 성인 여성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가 아동이라고 해도 처벌의 관대함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 (64)
  • 능욕당한 여성들을 변호하며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학생, 공무원, 남편, 아빠 들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평범성은 더욱 크게 부각되어 정상참작 사유가 된다.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가질 가능성이 보이거나, 자녀가 있으면 더욱 좋다. 장래가 촉망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인정되며, 남자라면 누구나 성적으로 일탈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린 경우는 성장기의 당연한 호기심의 발로라는 이유로 공감까지 얻는다. (71)
  • 이주 여성의 이혼 사건을 변론하다 보면, 이주 여성의 친권 및 양육 자격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자주 마주친다. 남편이 아무리 폭력을 행사하고 아내를 학대해도 이주 여성의 친권과 자녀 양육 능력은 의문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한국인 남자의 자식을 허락도 없이 이주 여성의 본국으로 데려가버릴 상황에 대한 의심까지 얹어진다. 한국에서도 자격이 없고, 본국으로 데려갈 수도 없는 모성이 바로 한국에서 이주 여성의 모성인 셈이다. (122)
  • 기소되거나 처벌되는 사례가 드물 뿐이지 낙태는 여전히 형사법상 범죄다. 이는 낙태하는 여성들이 불법적이 의료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시술 뒤에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낙태를 한 뒤에는 언제라도 범죄자로 처벌될 수 있는 굴욕적이고 위험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133)
  • 헌법재판소에서 변론할 당시 법무부는 낙태한 여성이나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여성이 '성행위를 즐길 뿐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철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법무부가 의견서를 철회하기는 했지만, 이는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137)
  • 낙태하지 않기 위해 피임을! 선택하기 위해 교육을! 죽지 않기 위해 낙태 합법화를! 이것이 우리 여성들의 슬로건이다. (141)
  • 한국 땅에서 미혼모들은 낙태를 해도, 아이를 낳아도, 입양을 보내도, 스스로 양육을 해도 손가락질받기 일쑤이고, 그중에서 가장 허락되지 않는 것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이다. 가부장 사회의 룰을 어기고 감히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미혼모에 대한 최대의 처벌은 아이를 키울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대신 아이를 빼앗음으로써 심장에 죽어도 지워질 수 없는 고통의 각인을 새겨 넣고 여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가부장 질서를 어긴 여성에게 주어지는 처벌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152)
  • 대를 잇고 인구를 유지·증가시켜야 한다는 명분에 집안의, 나라의 자궁 있는 여성들이 동원되고, 번식 욕망과 질병 치료 등의 선한(?) 명분에 자본의 이윤 추구 목적까지 결합하여 여성들이 원치 않는 출산을 하거나 난자를 배출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를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182)
  • "위안부는 더러운 이름이다" "위안부가 세계 여성에게 해를 끼친다면 미안하다" "위안부 누명을 벗고 싶다"며 이용수 할머니의 입에서 통제되지 못하고 저 깊은 단전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있다 튀어나온 말들, 그 말들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보다 인권운동가로 불러달라 하시면서도 피해자로서 겪은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아프게 느낀다. 할머니의 이런 말들은 진정 누구를 겨누고 있는가.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인가, 사과도 배상도 하지 않는 일본국인가. 지금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무능한 대한민국 위정자들인가. (198)
  • 감염병의 위기는 공동체가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지만, 역설적으로 차별과 배제의 실상도 낱낱이 보여주었다. 감염병 이후의 세상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나는 두렵다. 마트의 계산원들처럼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조용히 치워지는 사람들, 그리고 '집단 감염'이라는 공포심에 포획된 채 누군가 치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위장된 평화에 길들여지는 것이 감염병 위기 이후의 세상일까 봐 (232)
  •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책의 후기로 이 말 외에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여성을 위한 변론은 끝나지 않았다." (247)

아주 오래된 유죄/김수정/한겨레출판 20201111 248쪽 15,000원

"책에 담긴 대한민국 여성의 법적 투쟁사는 곧 사회의 규범을 최종적으로 해석·적용하는 사법에 대한 두드림이자 외침(7)"이다. 낙태죄 폐지에 대해 법무부가 제출한 의견서에서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여성은 성행위를 즐길 뿐,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로 폄하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 아니라 2018년 문재인 정부 시절이었다. 결국 낙태죄는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66년 만에 효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따따부따하며 논란이다.

남성은 꼭 읽으시라. 페미니즘 입문서가 아니라 남자를 갱생의 길로 인도하는 책이다.


덧. 오탈자
  1. 216쪽 8행 B소위가 당한 → B대위가 당한
  2. 240쪽 마지막 행 사건이 진상이 → 사건의 진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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