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숙제
- 경제가 흐르는 물이라면 민주주의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경제'는 주어진 조건에서 생산을 최대화할 때 성장한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제도를 만듦으로써 국민과 자원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끌어낸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따라 비슷한 인구와 자연조건을 가진 나라 사이에서도 경제적 성과가 크게 달라진다. 민주주의라는 그릇이 커야 국민과 자원이라는 잠재적 경제 역량을 실제 생산에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다. 민주주의 발전이 그릇의 크기를 키운다면, 민주주의 타락은 그릇에 금이 가게 만든다. 일본과 이탈리아 사례는 아무리 경제적 초강대국이라도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끝을 알 수 없는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
- 나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5년 내내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를 제대로 비판해야 10년, 20년 후에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오랜 기간 겹겹이 쌓인 민주주의 문제를 압축해 드러냈고, 그런 만큼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하는지도 명확하게 보여줬다. (9)
-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은 편법으로(불법은 아니다.) 민주주의 규범을 파괴하는 사례를 분석해 그 공통점을 운동 경기에 비유했다. 타락한 민주주의는 심판을 매수하고, 상대방 동의 없이 게임 규칙을 변경하며, 경기 외부자까지 이용하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정치가 바로 이러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사법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사법기관을 집권 세력에 유리하게 만들었고(심판매수), 야당 합의 없이 선거법을 개정했으며(일방적 규칙 변경),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총선 승리를 위해 정파적으로 활용했다(외부자 이용).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이런 현상이 '합법적' 독재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75)
- 한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이런 엘리트의 지대 동맹을 이완하고 해체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탓이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제도는 입법과 행정에 관한 것이다. 경제의 가장 중요한 제도는 기업 조직과 시장 경쟁에 관한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대통령제와 후자에 속하는 재벌이 한국에서는 개혁의 핵심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두 제도는 그 형태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이승만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21세기에 들어서 일자리와 부동산을 매개로 한 지대 동맹이 추가됐다. 엘리트 지대 동맹은 이전보다 더 공고해졌다. (85)
- 최저임금 결정 과정은 문재인 정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여론이 곧 민주주의이며, 여론이 과학적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 말이다. 소득주도성장을 채택한 이유도 그 내용이 대중의 선호에 부합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노동자 임금을 끌어올리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말은 정말로 달콤했다. (97)
- 부동산 죄악세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을 '억울남탓'의 프레임으로 죄로 만든 것이다. 참고로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담배 세금을 대폭 인상했을 때 흡연자들은 불만이 있어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었다. 담배에 죄악세를 매기는 것 자체에는 동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동산 세금은 담뱃세와 사정이 다르다. 죄악이 아닌데 죄로 몰려다 보니 내는 사람은 불만이었고, 내지 않는 사람도 불안했다. 결국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4년 동안 세율을 올렸다 내렸다. 범위를 넓혔다 좁혔다 하면서 누더기 정책을 만들었다. 여론도 싸늘했다. 게다가 효과도 그다지 없었다. 폭탄 세금을 부과할 것이라 윽박질렀던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세금이 주택 가격 하락에 영향이 별로 없다며 꼬리를 내리기도 했다. (105)
- 이탈리아 사례는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타락한 민주주의는 평상시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외부에서 위기가 닥치면 문제점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탈리아의 포퓰리즘 유산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나라 경제를 침몰시켰다. 엄청난 부채와 민간의 불신이 정부의 손발을 묶었다. 엉망이된 경제는 포퓰리즘 정치가 커지는 비옥한 토대다. 21세기 내내 경제 위기와 포퓰리즘 정치가 서로를 증폭시켰다. (187)
- 한국의 민주주의도 타락의 끝에서 이들 나라와 비슷한 격변을 겪게될까? 불행하게도 한국의 상황은 폭민정의 도래와 이후 파국을 암시하는 것 같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타락을 멈추기 위해 긴급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믿고 있다. (189)
- 여론의 지배로 왜곡된 민주주의는 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촛불 정부는 대중의 불만을 정치적 지지로 끌어낼 목적으로 경제정책을 수립했다.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투기꾼 책임론, 착한 적자론 같은 경제 정책이 대표적 사례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규칙을 확립해 국민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정부체제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여론의 지배로 편향되면 문제가 생긴다. 정부가 여론 주도층의 이해에 따라, 대중의 감정에 따라 제도를 바꾸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이유로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 피해를 크게 증폭시킨다. 시장의 실패에 대응해야 할 정부마저 실패하는 탓이다. (194)
- 세상에 완전무결한 시장은 없다. 시장은 항상 크든 작든 실패의 연속이다. 그래서 장기적 경제 성장은 정부의 시장 실패 대처 능력에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경제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부의 대처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복잡한 이유로 시장이 실패하고, 그 파급 범위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얼마나 시장 실패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에 따라 나라 경제의 잠재적 크기가 결정된다. 정부 대처 능력의 토대는 바로 민주주의다.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독재 정부의 결단력은 독단의 폐해로 되돌아온다. 과학적 분석을 경시하고 여론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포퓰리즘은 시장의 실패를 키운다. 요컨대, 경제력이 흐르는 물이라면 민주주의는 그릇이다. 그릇의 크기만큼 물을 담는다. 민주주의 수준이 경제적 수준의 상한선을 정한다. (199)
-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이 민주주의 타락을 막는 마술봉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살펴봤듯, 대통령이 변하지 않으면 개혁의 물꼬를 틀 수가 없다. 여론의 지배와 지대 동맹의 중심에 있는 대통령이 먼저 변해야 저성장 불평등 시대의 민주주의, 동아시아 안보위기 시대의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대통령제 개혁을 국민이 앞장서면 탄핵 촛불처럼 되고, 국회가 앞장서면 1940~1950년대처럼 대통령과 국회가 극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새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다. 레임덕이 발생하기 전에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려는 대통령보다,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는 대통령이 한국 정부의 발전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230)
대통령의 숙제/한지원/한빛비즈 20220328 256쪽 16,500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특히 제국주의는 도덕적 일탈이 아니고 당시 국제 표준에 가까웠다는 주장은 더욱 그렇다. 비판을 위한 비판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왼쪽 진영에서 내는 소리는 언제나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오답 노트로서 역할을 충분히 한다. 새 대통령에 대한 주문도 있지만, 숙제는커녕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는 마당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에서 밝힌 단상에 대한 대답 가운데 하나로 읽었다. "민주주의 수준이 경제적 수준의 상한선을 정한다"는 제언(提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본주의는 왜 멈추는가?》에서 밝힌 단상에 대한 대답 가운데 하나로 읽었다. "민주주의 수준이 경제적 수준의 상한선을 정한다"는 제언(提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