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의 힘 -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세계사

지정학의 힘 -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세계사
  •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반공 의식이 철저히 내면화된 나에게 공산국가 베트남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화해하고 손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분단국가 국민인 나는 상상력마저 분단됐었다. (9)
  • 미국이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중국, 베트남과 적대적 관계에서 우호적 관계로 전환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념적 차이보다는 현실적 국익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이 중국과 다시 대립하는 이유도 전략적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바로 지정학적 접근을 한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지금까지 국교 정상화를 주저해온 이유 역시 이념적 차이가 아니라 지정학적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어 멸망한 것도, 한반도가 분단되어 전쟁을 치른 것도, 지금까지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것도 그 배후에는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게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좌우 대결이라는 이념적 틀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오래전 국제사회에서 소멸한 이념적 틀에 갇혀 있는 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기 어렵다. 지정학적 인식 틀이 필요하다. (12)
  • 마한은 자신의 책에서 시파워를 결정짓는 여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지리적 위치, 천연자원 및 기후 등 물리적 환경, 영토의 크기, 인구, 국민성, 정부의 성격 등이 그것이다. (21)
  • 매킨더는 앞으로 중심 지역·국가에게 유리하게 세력균형이 이루어진다면 유로-아시아 주변부로까지 팽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방대한 대륙의 자원을 사용해 대규모 함대를 건조한 다음 마침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출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주장이 1904년 논문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것은 매킨더와 마한의 결정적 견해 차이로 매킨더는 지배적 랜드파워가 지배적 시파워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50)
  • 하우스호퍼와 함께 지정학도 지하에 매장됐다. 지정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하우스호퍼가 나치에 긴밀히 관련했다는 점에서 지정학은 이념적으로 파산했고 도덕적으로도 의심을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지정학은 철저히 터부시 됐다. 역설적이게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이자 닉슨 대통령 시설 국무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가 지정학이라는 단어를 다시 살려낸다. 하우스호퍼와 동향 출신인 키신저가 지하에 묻혀 있던 지정학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낸 것이다. (109)
  • 스파이크먼은 국토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치의 중요성은 교통수단, 교통 루트, 군사기술의 변화 그리고 세계 파워 중심의 이동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위치의 의미는 지리적·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116)
  • 키신저의 사고는 마한, 매킨더, 스파이크먼의 사고와 상통한다. 키신저는 날로 다극화되는 세계에서 세력균형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키신저는 지정학을 미국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정치에 대항하기 위한 분석 방법이자 이념적인 반공주의의 대안으로서 제시한 것이다. 키신저의 영향으로 미국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글로벌 전략을 검토하게 됐고 지정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화됐다. 이런 지정학적 전통은 미국의 안보 전략 수립에 있어 냉전이 끝날 때까지 여전히 강하게 작용했다. (163)
  • 브레진스키의 체스 게임은 여기서 멈춘다. 1997년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 대륙을 거대한 체스판으로 보고 미국이 드디어 이 체스판을 지배하게 됐다고 선언했으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그는 유라시아는 더 이상 어느 한 대국이 지배할 수 있는 체스판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일극unipolar 시대에서 다극multipolar 시대로 이전한 것이다. 유라시아는 체스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며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하는 바둑판이 됐다. (193)
  • 두긴에 따르면 현대 지정학은 서방과 동방이 가진 대극적 가치관의 대립이다. 물질적·기술적 발전, 자유민주주의적 조류, 개인주의, 인도주의적 세계관, 진보, 진화, 인권, 자유시장, 자유주의경제 같은 서방의 가치는 동방에서 부정된다. 동방에서는 전체주의, 사회주의, 권위주의, 비개인주의가 더 지배적이다. 사회, 국민, 민족, 이념, 세계관, 종교, 지도자 숭배 등이 우위에 있다. 돈의 법에 묶인 서방에 비해 동방은 이념의 법 위에 서 있다. 서방과 동방의 대립은 바다와 육지의 대립이다. 두긴은 바다와 서방을 대표하는 조류를 대서양주의 Atlanticism라고 부르고 육지와 동방을 대표하는 조류를 유라시아주의Eurasianism라고 부른다. 이제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대결은 대서양주의와 유라시아주의의 대결로 치환된다. 이 둘의 대립은 근원적이다. 대서양주의의 지정학적 발전은 1990년대에 이르러 정점에 달해 소련 해체에 이른다. (200)
  • 신냉전은 전통적인 강대국 간의 파워 경쟁이다. 많은 국가들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와 관계없이 중국과의 무역이나 중국의 투자를 환영한다. 중국, 러시아는 권위주의적 국가이지만 구냉전 때처럼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지 않는다. 미국도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더 이상 정치적 가치를 앞세우지 않는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전면에 나섰다. 모든 강대국들이 이제 자국의 정체성과 국익을 강조한다. 신냉전은 지정학적 냉전이다. (272)
  • 남북한의 군사적 대립은 한국에 주한미군을 유지할 확실한 근거를 제공한다.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동아시아에서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지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다. 북한이 종전 선언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이 아직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99)
  • 미국, 중국, 일본은 분단되고 대립하는 한반도를 원하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적극 나설 이유가 없다. 1953년에 휴전된 한국전쟁이 아직도 종료되지 않은 이유이다. (303)
  •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이념보다는 지정학이었다. 지리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강대국들의 욕망 또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정학적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제는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굴레에 수동적으로 갇혀 있기보다는 한반도에 더 나은 지정학적 구도를 모색해야 한다. 남북한 모두에게 지정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상상력의 38선을 철거하는 것이다. (329)

지정학의 힘/김동기/아카넷 20201118 360쪽 18,000원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이념보다는 지정학이었다." 지정학 대가들 이론에서 출발해서 한반도 지정학의 덫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반도의 운명과 미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임은 자명하다. 종전선언을 넘어 평화 협정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 환경이지만 담대한 상상력으로 큰 발걸음을 떼는 지도자의 출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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