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물학자들의 죄가 크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죄를 죄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에 뒤집어씌웠다. '적자생존'은 원래 다윈이 고안한 표현도 아니다. 다윈의 전도사를 자처한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작품인데 앨프리드 월리스Alfred Wallace의 종용으로 다윈은 《종의 기원》 제5판을 출간하며 당신 이론의 토대인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다윈의 죄는 거기까지다. 《종의 기원》은 물론,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과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그는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 모두를 제압하고 최적자the fittest가 돼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양한 예를 들어 풍성하게 설명했다. 그의 후예들이 오히려 그를 좁고 단순한 틀 안에 가둔 것이다. 이 책은 그 틀을 속 시원히 걷어낸 반가운 책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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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핵심이다. 우리의 진화적 적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적자'라는 개념이 '신체적 적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 논리를 야생에 대입하면, 덩치가 클수록 더 싸우려 들며 그럴수록 덤비려는 자가 적고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최상의 먹이를 독차지할 수 있고 가장 매력 있는 짝을 얻을 것이며 가장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잘못된 '적자'의 해석이 사회운동, 기업의 구조조정, 자유시장에 대한 맹신의 바탕이 되어왔으며, 정부 무용론의 근거로, 타 인구 집단을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근거로, 또 그런 평가가 야기하는 결과의 참혹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어왔다. 하지만 다윈과 근대의 생물학자들에게 '적자생존'이란 아주 구체적인 어떤 것, 즉 살아남아 생존 가능한 후손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며, 그 이상으로 확대될 개념이 아니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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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은 자연에서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고 썼다. 다윈을 위시하여 그의 뒤를 이은 많은 생물학자도 진화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이상적 방법은 협력을 꽃피울 수 있게 친화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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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수 세대에 걸친 가축화는, 기존의 통념과는 달리, 지능을 쇠퇴시키지 않으면서 친화력을 향상시킨다. 어떤 동물이 가축화될 때는 서로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많은 요소가 변화를 겪는다. 가축화징후라고 불리는 현상의 변화 패턴은 얼굴형, 치아 크기, 신체 부위별로 각기 다른 피부색에서 나타난다. 호르몬과 번식주기, 신경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연구에서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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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늑대로부터 갈라져 나온 이래로 많은 면에서 우리와 더 닮도록 진화해왔다. 사람이 전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진화를 도운 유전자가 개에게도 있어서 개는 조상인 늑대와 달리 사람이 채집하거나 경작한 양식도 거뜬히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고지대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인류의 유전자가 티베탄 마스티프종에게서도 발견되는데, 이 유전자로 인해 두 개체군 모두 산소가 희박한 높은 고도에서도 온몸에 체내 산소를 전달할 수 있다. 또 서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에게는 말라리아에 대한 항체 생산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있는데, 그 일대 가정에서 키우는 개에게도 이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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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사람이 길들이지 않았다. 친화력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가축화한 것이다. 이 친화력 좋은 늑대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현재 그들의 후예는 개체수가 수천만에 달하며 지구의 모든 대륙에서 우리의 반려동물로 살아가고 있으나, 얼마 남지 않은 야생 늑대 개체군은 슬프게도 끊임없이 멸종의 위협에 노출되고 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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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매력으로 대체함으로써 생존하는 데 사람을 활용할 수 있다면 어떤 동물이라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성하게 될 것이다.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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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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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단 내 타인을 위해서 기꺼이 돌봄을 제공하고 유대를 맺으며 심지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삶은 이 능력이 주도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그들을 그냥 참고 견뎌주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돕는다. 장기를 기증하는 큰 친절도, 누군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 작은 친절도, 이 유형의 친화력에서 비롯된 행동이다.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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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년 전에 일어난 사람의 자기가축화로 폭발적 인구 증가와 기술 혁명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화석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친화력이 여러 집단의 혁신가들을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기술혁명을 추동한 것인데, 이는 다른 어떤 사람 종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가축화가 우리 종에게 준 막강한 능력으로, 진화적 시간으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세계를 제패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종들은 하나하나 멸종되어 사라졌다.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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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의 자기가축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이렇게 묻는 사람이 반드시 나온다. "그냥 사람을 더 다정해지게 번식시킬 수는 없습니까?" 우리 종이 성공한 비결이 친화력이 커졌기 때문이라면 거기서 친화력을 더 키우도록 선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선택 번식으로 평온한 기질과 다정한 성격의 개나 여우를 키울 수 있다면, 사람이라고 안 될 것이 있겠는가?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의 본성 가운데 어두운 부분은 하나하나 제거하고 바람직한 형질만 살려 번식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안타깝지만 이런 생각은 으레 우생학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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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 윤리에 위배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공격성을 배제하는 선택이 너무나 쉬워 보였던 여우 실험도, 실은 매우 극단적인 선택 번식이었다. 이 실험에서는 사람에게 친화적인 개체라는 조건하에 많은 세대의 수많은 여우 가운데 단 1퍼센트에게만 번식을 허용했다. 우리 종의 친화력 선택 진화가 진행되던 후기 구석기시대, 우리의 인구 규모는 100만 명 이하로 그리 크지 않았고, 그 선택의 결과는 수만 년에 걸쳐서 나타났다.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 넘는 오늘날, 벨랴예프의 실험 속 여우들이 겪은 정도의 선택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69억 명 이상에게 번식을 금지시켜야 할 것이다. 설령 이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여우 실험처럼 간단하게 사람의 친화력을 측정할 방법이 없다.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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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가장 강력한 접촉의 형태는 진심 어린 우정이며, 우정에서 생성되는 관용은 전염되는 듯하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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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증오에 대해 명쾌한 예측을 제시한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외집단을 비인간화할 때, 즉 외집단 구성원을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말하는 것이 이를 듣는 상대방에게 최악의 폭력 행위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또한 사람을 동물이나 기계에 비유하거나, '쓰레기' '기생충' '체액' '오물' 등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형태의 증오언설이라고 본다.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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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제도는 만인이, 최악의 적까지도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기본으로 한다. 우리는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지도자는 외면하고 타인에게도 인간애를 실천할 것을 주장하는 지도자에게 정당과 소속을 떠나서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이다.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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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식지는 바뀌었지만 우리 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큰 규모의 집단 안에서 협력하며 살아갈 때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종이다. 우리는 출신이 다양한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할 때 가장 혁신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건축물이 관용을 베풀 때 그 안의 개인들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고 무례하지 않게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으며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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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등한 사상이다. 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가 될지 예상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석기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이던 시기에 그들은 송곳니 매서운 육식동물에서 개로 진화했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충분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는 그런 차이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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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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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축화 가설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 가축이 되었다. 사실 가장 높은 수준의 가축화를 이룬 종이다. 애착과 접촉, 호기심과 놀이, 공감과 협력 등의 여러 정신적 형질은 그 자체로 인간성의 본질이라 할 만하다. 헉슬리의 말처럼 사슴을 가련하게 여기고 늑대를 미워하는 우리의 마음은 인간 정신 가축화의 산물이다. 개도 스스로 인간에게 가축화된 독특한 종인데, 개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제법 비슷하다. 충성스럽고, 공감을 잘하며, 착하고, 따뜻하다. (310)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Survival of the Friendliest, 2020/브라이언 헤어
Brian Hare, 버네사 우즈
Vanessa Woods/이민아 역/디플롯 20210726 396쪽 22,000원
진화론을 배우며 우성과 열성이라는 용어 때문에 우열(優劣)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인류 진화도〉는 적자생존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었습니다. 적자생존은 '신체적 적자생존'과 동의어가 되어 우월한 종이 더 잘 생존한다는 오해를 낳았습니다. '가장 잘 적응한 개체 하나만 살아남고 나머지 모두가 제거되는 게 아니라, 가장 적응하지 못한 자 혹은 운이 나쁜 자가 도태되고 충분히 훌륭한, 그래서 손에 손잡고 서로에게 다정한 개체들이 살아남는 것(6)'이라는 학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책은 자기가축화 가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개는 사람이 늑대를 길들여 가축화한 것이 아니라 친화력(다정함)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가축화했다는 가설입니다. 아울러 사람이라는 종도 친화력이 높아 스스로 가축화 되어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와 인간은 우정, 사랑, 공감, 협력, 친화력과 다정함으로 자기가축화에 성공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죽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냐가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라고 알려줍니다. 인간과 개만도 못한 인간이 공존하는 이유도 알려줍니다.
개와 인간은 서로 가축화한 존재이며 자연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자기가축화 가설에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