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정치사회학 - 그날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

오월의 정치사회학 - 그날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시선
  • 다시 그날의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와 5·18 당시의 국가 폭력이 여타 폭력들과는 구별되는 다른 성격이었다면, 우리는 통상 학살로 칭하는 이 폭력의 독특한 성격에 주목해야만 한다. 즉 '반대파에 대한 산발적인 폭력이나 고문 등 여타의 억압 수단을 동반하는 국가 테러'와 '정책 결정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정책인 학살'을 구분해 분석할 때만이 오월광장의 의문에 답할 수 있는 학술적 통로를 열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5·18 연구의 무게중심을 피해자의 서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가해자에 대한 논의로 이동시키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7)
  • 1948년 정부 수립 당시 이승만의 언술은 이 같은 최고지도자의 행동양식과 동인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하거나 전복하려는 권리를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막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최초 정부의 출범 선언은 국민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반공이 하나이며, 자신에 대한 반대도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는 걸 공식화한 것이다. (20)
  • 더불어 한국의 경우 정규군이 학살에 참여하는 주요 동인으로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요소(명령체계에 따른 복종, 동료집단의 압력과 집단의 순응성, 이데올로기 주입 효과)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근대 정규군의 일반적 특성으로 일컫는 '명령체계에 따른 복종' 문화다. '한국군은 그 모태가 된 일본군, 더 좁게는 일본 육사 출신'의 영향으로 미국이나 여타 서구에 비해 훨씬 강력한 "계급별, 학년별, 선후배별 지배와 복종 관계가 철저히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 한국군은 해방 정국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근대국가 건설기와 베트남전 당시 해외 파병에서 이미 두 차례나 집단학살을 학습했다. 따라서 이러한 학살에 대한 학습효과는 5·18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적 학살 사건의 중요한 유인이 됐으며, 당시 가해자들의 행동양식을 규명하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한 배경이 된다. (27)
  • 1980년 5월 한국의 공식 이데올로기 지형은 이미 반공주의라는 대전제 속에서 문화적 거리와 도덕적 거리가 교묘히 결속된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공산주의자이거나 혹은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씌울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국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공식적 경계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공산당, 간첩, 더 나아가 폭도는 도덕적 거리의 구성 요소인 법적 확증과 처벌 정당화의 메커니즘 구획 안에 있었다. 또한 이승만의 말처럼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해야 할 만큼 수십 년간 인권의 경계 밖에 있었던 '빨갱이'는 이미 일종의 의사 인종주의 형태의 문화적 거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43)
  • 가해자들이 취할 수 있는 정책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학살이나 제노사이드의 실상이나 동기를 철저히 은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거나 그 영향력이 미미한 차원에 머물렀던 기존 사회 균열을 활성화하는 더 적극적인 개입 방식이다. 이때 단순히 감정 차원에 머물렀던 한 집단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이나 혐오를 실질적 위협으로 과장하는 방식이 즐겨 사용된다. 학살을 은폐하는 전자의 경계가 국경선이라면, 갈등을 증폭시키는 후자의 범주는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 사회집단을 제외한 내부 국민이다. 5·18의 경우 이 두 가지 목표가 동시에 실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65)
  • '엘리트 집단의 무관심이 히틀러에게 특히 도움이 되었다'는 로버트 웨이트의 지적처럼, 이들의 입장 표명은 그 사회가 학살을 대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나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의 침묵은 그들이 이미 점유한 도덕적·윤리적 권위로 인해 일반인들의 방관보다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의 학살에 대한 침묵은 그 자체로 폭력을 용인하는 메시지를 가해자들과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83)
  • 사실 민주화 이후 호남 지역의 투표 결집에 대한 학문적 의문은 '그들은 왜 한 정당에만 투표하나?'보다 '그들은 왜 결코 한 정당에는 투표하지 않는가?"가 합리적이다. 가해자였거나 가해자를 계승한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 행위는 정치심리학적으로 타당한 합리적 선택인 탓이다. (140)
  • 주지하듯이 5·18은 학살이 발생한 여타 국가와는 달리 민족, 인종, 경제적 지위, 종교 등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국가는 사건의 주된 원인으로 잠재적 혹은 미약한 균열에 머물렀던 '지역주의'를 지목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형된 지역주의 담론이 5·18의 발생 요인을 설명하는 주요 담론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 학살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5·18은 극도의 사회적 분열이 지속된 사회와는 거리가 먼 균일한 모델의 국가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이며, 그 과정에서 국가에 의해 고안된 균열이 이후 주요한 균열로 부상하게 됐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학살과 사회 균열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결정적 사례의 지위를 지닌다. (148)
  • 앞서 밝혔듯이 이 글은 5·18을 '정치적 학살'로 분류한다. 그 근거는 희생자들이 단지 인종, 종교, 국적과 같은 희생자의 특질이나 지역으로 구분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정권이나 지배 집단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이유로 희생됐기 때문이다. (149)
  • 정치적 학살의 관점에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5·18의 공통점은 민간인과 공산주의자의 구분이 시민과 폭도의 대비로 오롯이 이전되었다는 점이다. 국민과 비국민을 결정짓는 잣대로 다시 한번 반공이데올로기가 이용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빨갱이에 대한 학살이 정당화되었듯이 폭도라 명명된 시민들에 대한 학살 역시 정당화되었다. 이는 가해자의 성격에 따라 희생자의 특성이 변질되는 형태로 되풀이된다. "빨갱이여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빨갱이가 되었으며, 누구에게 죽었는가가 이후 이들의 정체성을 결정하였다"는 한국 전쟁 시기 학살 피해자의 증언처럼 "폭도라서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고 나서 폭도로 명명되는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176)
  •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시기 학살이 국민국가 수준의 위기였다면, 5·18은 정권 차원의 위기였다. 전자가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전쟁을 통해 국민과 비국민을 결정짓는 도중 발생한 폭력이었다면, 후자는 쿠데타를 동반한 수동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177)

오월의 정치사회학/곽송연/오월의봄 20230510 216쪽 17,000원

5·18 피해자의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가해자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어떻게 가해자가 되어 학살을 저질렀는지를 분석합니다.

저자는 5·18을 정치적 학살로 규정합니다. 희생자들이 인종, 종교, 국적이 아니라 '정권이나 지배 집단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이유로 다단계 쿠데타 세력에게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인 한국군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이미 집단학살을 경험했습니다. 민간인과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한 학습효과가 5·18이라는 정치적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빨갱이여서 죽인 것이 아니라 죽이고 나서 빨갱이를 만들었듯이 5·18 희생자를 죽이고 나서 빨갱이가 배후에 있는 폭도라고 했습니다.

엘리트 집단이나 종교와 정치지도자들의 침묵이나 방관은 학살을 용인하는 상징적 의미가 일반인들보다 더 큽니다. 이들의 입장 표명이 학살을 대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호남 지역의 투표 결집은 '그들은 왜 한 정당에만 투표하나?'보다 '그들은 왜 결코 한 정당에는 투표하지 않는가?"가 합리적입니다. 지금까지도 진상 규명은 지지부진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자연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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