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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with the label 서시

서시 - 김정환

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가 아니라 이제는 목전의 전율의 획일적 이빨 아니라 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 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 너는 네가 아니라 내 고막에 묻은 작년 매미 울음의 전면적, 거울 아니라 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 음악의 몸일 때 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너는 나의 연주다. 민주주의여. 거푸집 연주/김정환/창비 20130515 민주주의를 향해 절규하던 그 빛나는 청춘을 포함해서 그가 살아온 세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저 20세기 후반이 계몽과 이성의 처절한 시대였던 점을 상기한다면, 이 죽음의 전망은 또다시 복잡하다. - 황현산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시대가 이십세기와 함께 끝날 줄 았았다. 이십일세기가 헬조선이 될 줄 몰랐다. 선배들에게 송구스럽다.

서시 - 박진숙

그 끝없는 벼랑 위의 길 파도치는 바다의 새벽 속으로 열렸다, 닫혔다, 천 길 허공이구나 꽃 한 송이 피고 지는 동안이구나 혜초일기/박진숙/문학세계사 20041009 159쪽 6,000원 시인은 말한다. 내가 부르는 삶의 노래. 부처가 아니어도 좋다. 서늘한 보리수 가지가 아니어도 괜찮다. 땅을 가르고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저 불타는 장작나무로 족하다. 절대의 침묵은, 노래가 끊기고 한 줌 재가 되어 자취 없이 흩어지는 것은, 모두 그 후의 일. 사는 동안 아낌없이 이승을 사랑한 후의 일. 시집은 왕오천축국전을 따라가는 순례의 길을 서시를 포함해 108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시집이다. 그 길은 "끝없는 벼랑 위의 길"이고 "천 길 허공"이지만 "꽃 한 송이 피고 지는" 찰나의 순간을 사는 우리가 언제나 인사하며 가야 하는 길이다. 나마스테...

서시 - 이동순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달리던 노루는 찬 기슭에 무릎을 꺽고 날새는 떨어져 그의 잠을 햇살에 말리운다 지렁이도 물 속에 녹아 떠내려가고 사람은 죽어서 바람 끝에 흩어지나니 아 얼마나 기다림에 설레이던 푸른 날들을 노루 날새 지렁이 사람들은 저 혼자 살다 가고 그의 꿈은 지금쯤 어느 풀잎에 가까이 닿아 가쁜 숨 가만히 쉬어가고 있을까 이 아침에 지어먹는 한 그릇 미음죽도 허공에 떠돌던 넋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리라 이 땅에 먼저 살던 것들은 모두 죽어서 남아 있는 어린 것들을 제대로 살아 있게 한다 성난 목소리도 나직이 불러보던 이름들도 언젠가는 죽어서 땅위엣것을 더욱 번성하게 한다 대자연에 두 발 딛고 밝은 지구를 걸어가며 죽음 곧 새로 태어남이란 귀한 진리를 얻었으니 하늘 아래 이 한 몸 더 바랄 게 무어 있으랴 개밥풀/이동순/창작과비평사 19960430 120쪽 3,500원 내 삶은 누구의 죽음을 먹고 사는데 그 값도 못하고 있다. 그저 시간만 삼키다 보니 점점 어린 것들 볼 낯이 없다. 귀한 진리가 내게서 끝날지 모르는 죄책감이 드는 시대다.

서시 - 유경환

바람이 산을 흔들 수 없어 물을 간질이면 물 속의 산 흔들린다. 낙산사 가는 길/유경환/문학수첩 20021002 222쪽 6,500원 우리는 산을 흔들 수 있을까? 다시 바람이 분다.

호수와 나무 -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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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오규원/문학과지성사 20050630 140쪽 9,000원 높이와 깊이로 서는 나무. 담고 싶다. 닮고 싶다.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이정록/문학동네 1994 마을 가까이에 있는 나무도 흠집이 있는데 마을에 사는 나는 이토록 성하게 있습니다. 소시민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바람 부는 대로 어영부영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상처가 나도 부러지지 않는 나무를 한 그루 심으렵니다.

서시 - 류시화

- 어느 인도 시인의 시를 다시 씀 누가 나에게 옷 한 벌을 빌려 주었는데 나는 그 옷을 평생동안 잘 입었다 때로는 비를 맞고 햇빛에 색이 바래고 바람에 어깨가 남루해졌다 때로는 눈물에 소매가 얼룩지고 웃음에 흰 옷깃이 나부끼고 즐거운 놀이를 하느라 단추가 떨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 옷을 잘 입고 이제 주인에게 돌려준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류시화/열림원 19961031 109쪽 8,500원 지 나오는 모습도 기억을 못 하고 날 때부터 옷을 껴입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한 인간은 갈 때도 겹겹이 옷을 입고 바리바리 싸서 떠나려고 한다.

서시 - 박목월

어머니를 나는 노래할 수 없다 나는 너무나 부족한 人間이므로 어머니는 너무나 크신 분이므로 어머니를 나는 노래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를 노래하려 한다 어머니를 노래하려고 애쓰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자랄 수 있으므로 나는 너무나 부족한 人間이므로 어머니를 나는 노래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를 노래하려 한다 어머니를 노래하려고 붓을 가다듬는 동안만이라도 마음속 가까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으므로 어머니를 노래하는 동안에 나는 걸음거리가 조심스러워지고 어머니의 사랑의 물줄기가 나의 가슴에 이어와서 내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어머니를 노래하는 동안만이라도 나는 마음에 환하게 등불을 켜지고 가슴이 더워 오는 행복감에 잦아 들게 된다 어머니/박목월/三中堂 1967 170원 오늘은 진종일 불효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어머니를 노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머니 가슴에 꽃도 달아드리지 말고 제대로 진상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삼백예순나흘 동안 어머니를 노래하며 어머니를 위한 꽃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노래는커녕 삼백예순닷새 동안 진상이라서 오늘 하루종일 울고 있습니다.

서시(만약에) - 조은지

신이 내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면 그런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 갖고 싶은 추억 하나 있습니다 서삼릉 입구에 가면 아름드리 미루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길고 좁은길 있습니다 투명한 가을 하늘 속에 숨겨져 있는 생각들 하나 하나 꺼내 이야기하며 떨어지는 낙엽 속으로 그대와 그곳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그 길 혼자 걸을 때 어김없이 찾아오는 저녁 노을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바람도 그리고 나도 늘 주문처럼 그대의 행복을 기도합니다 달을 따라 이 길을 그대와 걷는다면 길가에 한 식구로 모여 사는 갈대나 봉숭아 꽃잎 같은 표정으로 은밀히 우리들의 뒤를 따라오던 낙엽도 눈 껌벅이는 참새와 함께 날 보며 기뻐해 주지 않을까 그대와 그곳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그대 잊기로 한지 두달이 지났습니다/조은지/자음과모음 20010115 118쪽 5,500원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신 때문에 이마저 추억이 되고 시가 되었다. 기억 못 하는 추억마저도 모두 행복하시라.

서시(산경표 공부) - 이성부

물 흐르고 산 흐르고 사람 흘러 지금 어쩐지 새로 만나는 설레임 가득하구나 물이 낮은 데로만 흘러서 개울과 내와 강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듯이 산은 높은 데로 흘러서 더 높은 산줄기들 만나 백두로 들어간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산은 위로 치솟는다 흘러가는 것들 그냥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것 아님을 내 비로소 알겠구나! 사람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들 흘러가는지 산에 올라 산줄기 혹은 물줄기 바라보면 잘 보인다 빈 손바닥에 앉은 슬픔 같은 것들 바람소리 솔바람소리 같은 것들 사라져버리는 것들 그저 보인다 *산경표(山經表) :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나라 산의 족보격인 지리서.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중심축을 이루는 산줄기인 1대간(大幹),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을 지형·지리학적으로 기술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지질학적 '산맥' 개념과는 사뭇 다른 책이다. 지리산/이성부/창작과비평사 20010601 160쪽 10,000원 산경표는 우리나라 산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흐르다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형식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은 신라 말에 처음 등장하고, 여암 신경준이 편찬(1769년)한 산경표에 의해 완성이 됐다고 합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조선 후기의 지리서는 모두 산경(山經)에 기초하여 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같은 산맥의 개념은 일본의 지질학자가 1903년 발표한 논문에서 비롯되었는데 일제가 우리 전통을 말살하기 위해 도입이 되었습니다. 산맥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반도의 산은 모두 한 줄기로 엮여 있어 강이나 하천을 건너지 않고 산줄기만 타고 다 갈 수가 있답니다. 강을 위주로 산과 산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바로 산경표입니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 산경표의 한 점이 되어 산줄기 물줄기에 사람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 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