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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 김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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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새벽빛 그리고 허황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밤의 입국 심사/김경미/문학과지성사 20140825 186쪽 9,000원 왜 그러는가 별은 또 내게 왜 주는가 언제 무엇으로 다 갚으라고 무한대의 빚부터 안기우고 시작하는가 1 이별은 그녀가 사랑을 유지하는 유일한 자세 멀리 떨어지는 것은 누군가를 얻는 유일한 방식 2 아직도 시킨다고 따라나서는 것도 아직도 청춘이 시키는 일이라고 믿는 청춘이 있다는 것도 다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3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4 누가 누구와 헤어지는 건 언제나 전대미문의 일정이다 5 밤의 입국심사서를 써야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6 음력은 음력대로 양력은 양력대로 충격이어서 피곤한 날은 입술 대신 달력이 부르튼다 7 이목구비에 직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8 땅 위의 국경들 끝없는 듯해도 발밑은 언제나 같은 물속입니다 9 당신 몰라? 인생은 안 바꿔주는 거요 10 바늘이 무던함을 배워 열쇠가 되었다는데 11 살아온 날의 절반보다 시를 쓴 날이 더 많은 시인에게서만 나는 느낌이 있다. 밤, 청춘, 그리움, 기다림, 자책, 슬픔, 첫사랑, 애인, 이별, 상처, 중년, 실패 그리고 '지나온 날짜들 너무 쓰라리고 갖고픈 날짜들 너무 멀었던'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간이 있다. 시 한 편 한 구절마다 왕성한 청춘까지 반추했지만 끝내 환불을 못 한 중년만 남았다. 지구의 위기가 내 위기인가 자세와 방식 청춘이 시키는 일이다 오늘의 결심 전대미문(前代未聞) 연애의 횟수 그의 달력 공부 마흔 세상의 기척들 다시 쓰다 불량품 소사(小史) 열쇠

시인의 말 -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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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춤을 춥니다. 시 속에서는 모든 게 허용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도 숨을 쉬고, 주소와 번지가 다른 감정들이 서로 어울리고, 나도 모르는 먼지들이 스며들어 노래가 되었지요. 시를 버릴까, 버려야지, 버리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지만 어이하여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지. 그동안 저를 먹여 살려준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공항철도/최영미/이미출판사 20210512 108쪽 10,000원 제 임무를 다하고 잊혀진 3월은 아픔을 참으며 겨울과 싸우느라 다치고 터진 생살을 꿰매고 다음 전투를 위해 제 몸을 추스르며 또 1년을 기다린다 1 눈을 감았다 떠 보니 한강이 거꾸로 흐른다 2 적을 만드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 3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불평쟁이가 되었다 4 두터운 겨울 코트를 벗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이가 되었다 5 완벽해 보이는 것들이 제일 위험해 6 사랑과 분노가 있어야 큰일을 한다 이제 분노할 힘도 없다 분노할 열정이 있다면 연애를 하든가, 맛있는 거 찾아 먹겠다 7 세상이 갖고 놀다 버린 햇빛 한줌 도망치듯 유리문을 빠져 나간다 8 시와 생활을 감히 섞으려 했으니 혼 좀 나거라 9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진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10 틀린 시간과 싸우는 것이 되풀이되는 역사는 진작 끝났어야 한다. 두꺼운 겨울 코트를 벗고 봄에 한없이 행복하다 못해 심심해서 이를 닦는 세상이 바삐 와야 한다. 세상은 시인이 뒤로 가는 열차에 다시 오르지 않게 하시라. 3월에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쓰니 3월이게 하시라. 3월 공항철도 최영미 육십 세 사랑의 종말 센티멘탈 sentimental 낙서 My Bed 죄와 벌 최후진술

시인의 말 - 이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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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여 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악의 평범성/이산하/창비 20210205 148쪽 9,000원 28살 무렵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적의 심장부에 두번째 폭탄을 던지는 심정으로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가사를 썼다. 1 모난 돌과 바위에 부딪혀 다치는 것보다 같은 물에 생채기 나는 게 더 두려워 강물은 저토록 돌고 도는 것이다. 2 누구나 그렇듯 상처 준 것들보다 상처 받은 것들을 먼저 기억했다. 3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4 우리 시대의 꿈은 90%가 자본의 덫이다. 5 죽은 자 여럿이 산 자 하나를 따라가고 있다. 6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7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8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9 촛불을 삼킨 스타 괴물들이 지상을 배회하고 있다. 10 낡은 것이 갔지만 새로운 것이 오지 않는 그 순간이 위기다. 11 그러니 심지 없는 촛불이 아무리 타올라도 우리의 비정규직 민주주의는 여전할 것이고 세상도 기극권자들을 위해 적당하게만 바뀔 것이다. 그래서 난 촛불이 타오를수록 더욱 슬프다. 12 자본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한 사람이 쪽박이고 신자유주의는 한 사람이 대박이면 열 사람이 쪽박이다. 13 자본주의는 위기 때마다

시인의 말 - 유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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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죽고 난 뒤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는 당신의 물건들이 놓여 있다 어떤 것은 나대로 사용할 것이고 어떤 것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끝내 찾지 못해서 방에 앉아 울었다 내가 죽고 난 뒤로 방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 책은 돌아와 마저 쓰인 것이다 연애의 책/유진목/삼인 20160515 108쪽 8,000원 엄마는 내가 제일 처음 떠나 온 주소입니다 1 전말은 알 수 없고 절망이 길어진다 가망이 없더라도 희망의 용법을 구한다 2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 몇 개의 간단한 문장 부호로 수식하는 것 말고 우리에게는 인용도 참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3 어디로 가야 당신을 볼 수 있습니까 모든 게 다 당신이야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에게만 있는 것이 고맙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그리로 가겠습니다 4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5 그래도 삶은 사랑은 낡아진 속옷 모양 푹 푹 뜨거워지니 너무 오래 붙들었나요 6 어제는 사랑이 처음 배운 단어인 것처럼 고백이 하고 싶었어요 7 질문이 많은 자는 살인을 할 수 없으니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8 불행한 사람에게 어떻게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9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이 시집을 "한국 최고의 연애시집"이라고 평했다. 최고의 연예시집은 아닐지 모르지만 열 몇 권쯤 되는 사랑을 잘라내고 도려냈을 사연이 선명하다.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 10 "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절망에게 지는 것이다. 반송 타전의 전말 당신, 이라는 문장 첩첩산중 잠복 부재중 통화 어제 매장

시인의 말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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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죄목으로 부산구치소 0.7평 독방에 갇혔을 때 비로소 자유의 참맛을 알았다. 하루 세끼 변기통에서 식기를 세척하다보면 마음이 한없이 소박해지고 깨끗해졌다. 하루 사십분 창살 틈으로 들어왔다 가는 '다람쥐 꼬리'만 한 햇빛에 얼굴을 내밀어 해바라기하는 일이 놀라운 일이었다. (...) 악독하고 비참한 일들도 많은 세상이지만 그보다 더 존엄하고 아름다운 일들로 가득찬 게 이 생명의 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살아가며 배우지 말아야 할 말 중 하나는 '절망'일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송경동/창비 20160222 176쪽 8,000원 가장 가파른 곳에 서본 사람들은 안다 관념보다 귀한 게 물질임을 노동이 사람을 얼마나 사람답게 하는 것인지를 1 신고만 받고 AS는 단 한 번도 안하는 저 국가에는 항의도 못해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낡아간다 2 이기고 지는 것만이 무엇을 이루고 못 이루고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는 삶의 시간들 3 더이상 이 모욕적인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4 사랑은 한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5 이 위대한 국가가 오늘 기를 쓰고 밀어내는 것이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내일임을 고마워하자 6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의 자리를 덜어내고 그곳에 '무한이윤'이라는 탐욕을 채워넣었다 7 제국주의가 포탄으로 이룬 세계화를 우린 사랑과 연민이라는 아주 오래된 재래식 무기로 이룰 것이다 8 내 삶의 저작권도 실상은 내게 있지 않다 9 일을 할수록 더 빈곤해지는 나이도 먹기 전에 쓸모없어지는 죽어서도 생계나 공장을 떠나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동물들 이야기 10 다시 돌멩이를 들지 않고 다시 스크럼을 짜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나요 11 세월이 흘러도 양철북처럼 키가 자라지

시인의 말 - 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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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무모해지더라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의 요구에 현실이 선택되거나, 시의 행위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라면, 시가 오히려 삶을 소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기회주의자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또 낭패다 싶은 것은, 허술한 내 처신에 있다. 돌아서면 시들이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빨리 비워지고 자기혐오의 속도도 더 빨라졌다. 나도 내 것을 좀 지니고 살아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안 된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폐허를 인양하다/백무산/창비 20150820 160쪽 8,000원 나는 왜 마르고 닳도록 관행적으로 나인가 1 멈추지 않는 직선의 되풀이 2 핵은 최후의 착취다 사물의 심장을 파먹는 짐승이다 3 배가 다 기운 뒤에도 기다려야 하는 명령이 있다 목까지 물이 차올라도 기다려야 하는 명령이 있다 모든 운항 규정은 이윤의 지시에 따르라 4 눈에 보이지 않는 독재자는 이제 권좌에 있지 않고 독재를 찬양하는 기술에 있다 모든 독재자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다 진보주의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기술은 첨단산업처럼 눈부시다 5 위장된 땅에 주저주저하다 퍼렇게 병든 씨앗이여, 시여 6 정규직 노예가 되고 싶다 비정규직 노예를 철폐하라 불안정 노예를 정규 노예화하라고 외쳐야 한다 인간에게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7 선거에서 정의가 승리하고 만세를 부르고 노동자는 철탑에 올랐다 선거에서 국민이 승리하고 카퍼레이드를 하고 노동자는 송전탑에 올랐다 선거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고 정권 교체를 하고 노동자는 굴뚝에 올랐다 8 어제 소모한 자질구레한 나의 분노는 어디서 삶을 빼앗긴 누군가 짓밟혀 내지르지도 못한 분노는 아닐까 9 고난의 행군 끝에 민주화 완성했다 말하지 마시게 10 여전히 최저시급은 만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노동자는 철탑 위에서 시위한다. 촛불은 혁명이었고, 2020년 총선은 대변혁이었지만 세상은 혁명적이지도 변혁

시인의 말 -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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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정신이 사나워져 시를 잊고 살았다. 길을 가다 번뜩 떠올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멋진 구절이었는데, 나중에 아까워했지만...... 가슴을 두드렸던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 되살릴 길 없는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문자 예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느 봄날, 봉긋 올라온 목련송이를 보며 추억이 피어나고 노래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동안은 시를 영영 잃지 않을 게다. 다시 오지 않는 것들/최영미/이미출판사 20190626 112쪽 10,000원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1 사랑하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 2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3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가 아니라 여성의 이름으로 우리의 역사를 써야겠다 4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나 다시 중심에 섰다.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는 원로 시인을 풍자한 〈괴물〉로 문단내 성폭력을 고발했다. 여성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 나는 작은 바퀴 하나를 굴렸을 뿐. 그 바퀴 굴리는데 나의 온 힘을 쏟았다. " 이제 칼날 위에서 내려와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괴물 마지막 여름 장미 독이 묻은 종이 여성의 이름으로

시인의 말 - 김소연

한 사람이 불면의 밤마다 살아서 갈 수 있는 한쪽 끝을 향해 피로를 모르며 걸어갈 때에 한 사람은 이불을 껴안고 모로 누워 원없이 한없이 숙면을 취했다. 이 두가지 일을 한 사람의 몸으로 동시에 했던 시간이었다. i에게/김소연/아침달 20180910 104쪽 10,000원 얼굴은 어째서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을까 1 나쁜 짓을 이제는 하지 않아 나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 2 식물이 만드는 기척도 시끄럽다며 여전히 복도에서 화분을 기르고 있니 3 우리는 서로의 뒷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을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4 창밖은 똑같고 유리창은 매번 다르다 5 시인이 숙면의 밤과 불면의 밤을 보내는 덕분에 누구는 뻔뻔하게 잠을 잤다.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는 걸로 하자. 바깥 경배 i에게 우리 바깥의 우리 쉐프렐라

시인의 말 - 이은규

옛날 인간에게 노래가 없던 시절 하늘에 있는 나무의 씨앗을 훔친 죄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시를 얻게 되었다는 한 부족의 신화 내 안의 신에게 첫 노래를 전한다. 다정한 호칭/이은규/문학동네 20120420 140쪽 8,000원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씩 모자라 닿지 못 하는 곳에 네가 있다 1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 사이에 구겨지는 편지 몇 번 더 마침표를 앞에 두고 찢겨지는 문장들 2 문장보다 즐겨 읽는 행간 사이, 그늘이 고인다 3 끝 문장의 쉼표는 첫 문장 마침표의 도돌이표 4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라 선언해요 5 다시 연애편지를 쓴다면 다정한 호칭을 뒤적이고 있을 것이다. 놓치다, 봄날 심야발 안부 묵독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 점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