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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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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자들의 죄가 크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묘사하기 바빴다. 그리고 그 죄를 죄다 찰스 다윈 Charles Darwin 의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 '에 뒤집어씌웠다. '적자생존'은 원래 다윈이 고안한 표현도 아니다. 다윈의 전도사를 자처한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 의 작품인데 앨프리드 월리스 Alfred Wallace 의 종용으로 다윈은 《종의 기원》 제5판을 출간하며 당신 이론의 토대인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을 대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다윈의 죄는 거기까지다. 《종의 기원》은 물론,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과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그는 생존투쟁(struggle for existence)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오로지 주변 모두를 제압하고 최적자 the fittest 가 돼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양한 예를 들어 풍성하게 설명했다. 그의 후예들이 오히려 그를 좁고 단순한 틀 안에 가둔 것이다. 이 책은 그 틀을 속 시원히 걷어낸 반가운 책이다. (4) 협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핵심이다. 우리의 진화적 적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적자'라는 개념이 '신체적 적자'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 논리를 야생에 대입하면, 덩치가 클수록 더 싸우려 들며 그럴수록 덤비려는 자가 적고 따라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므로 최상의 먹이를 독차지할 수 있고 가장 매력 있는 짝을 얻을 것이며 가장 많은 후손을 낳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잘못된 '적자'의 해석이 사회운동, 기업의 구조조정, 자유시장에 대한 맹신의 바탕이 되어왔으며, 정부 무용론의 근거로, 타 인구 집단을 열등하다고 평가하는 근거로, 또 그런 평가가 야기하는 결과의 참혹함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되어왔다. 하지만 다윈과...

시인의 말 - 이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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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량한 단어를 오래 모으면 울창해질 거란 믿음이 시작한 일 손끝에서 이파리가 쏟아지는 꿈을 꿉니다 빛 같은 잎들이 읽히고 빚 같은 과오들 떨어져 나가는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이훤/문학의전당 20160823 138쪽 9,000원 자물쇠 같던 낱말들 누가 부러뜨려 놓고 갔습니까 1 한 사람을 헤아리는 일만큼 치열한 일이 있을까 2 희망은 갑자기 온다 3 일 년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났습니까 4 네가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문장이 되고 싶다 5 그대도 오늘 누군가에게 위로였다 6 너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 화분을 들였다 아침마다 바람이 답장을 두고 갔다 7 분주하지 않은 채점표를 들고 신(神)은 아직 관조합니다 8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한 시절의 미완성이 나를 완성시킨다 9 나는 그대가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답장이 되고 싶습니다. 알리바이 역자 온다 특별한 날이라며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욕심 그대도 오늘 편지 어느 계급주의 사회의 화창한 하루 철저히 계획된 내일이 되면 어제를 비로소 이해하고

진보와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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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상 진보란 본래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것은 진보라고 하지 않으며, 오로지 미래에(내일 아침이라면 제일 좋겠다)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만이 진보가 된다. 앞의 세대가 이루어 놓은 일을 진보라고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토록 힘들게 싸워 이루어 놓은 것들이라는 게 조금만 지나면 원래부터 당연히 그랬어야 할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수전 니먼(234) '좌파'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안녕을 보장받고 스스로의 삶을 피워낼 수 있도록 다종다기한 활동을 벌이는 집단을 뜻한다. 그중에는 자본과 국가 권력에 맞서는 투쟁과 싸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피폐해진 사람들의 물질적·정신적 삶을 보호하고 복구하기 위한, 즉 삶을 다시 구축하기 위한 여러 활동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 우리 모두 모래알같이 파편화된 개인을 넘어 함께 살아가며 사회를 이루는 이웃이요, 형제자매였음을 회복하면서 사회 전체를 재구성해나가는 활동까지도 포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단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투쟁과 요구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회가 건설되는 데에 필요한 여러 정치적·도덕적·미학적·문화적 요구로 전선을 계속적으로 확대해나가는 집단을 뜻한다. - 홍기빈(284)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Left Is Not Woke, 2023 /수전 니먼 Susan Neiman /홍기빈 역/생각의힘 20240425 296쪽 19,000원 워크 Woke 는 1938년 "깨어 있으라 stay woke "는 노래 구절에 등장한 것이 그 기원이다. 블루스 가수인 레드벨리 Leadbelly 가 1938년에 발표한 노래 〈스코츠보로 소년들 Scottsboro Boys 〉은 "억울하게 강간죄를 뒤집어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오랜 국제적 항의로 누명을 벗게 된 아홉 명의 흑인 소년에게 헌정된 노래(15)"였다. 이후 "불의에 맞서 깨어 있고 차별의 여러 증후를 언제나 감시할 것을 뜻했다(6)...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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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 데 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페미니스트는 답이 없는 두 선택지에서 억지로 답을 고르는 게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거나 질문 자체를 바꾸는 사람이다. (5) 모든 운동과 이념이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순간 억압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배웠다.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22)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게 해주고, 정의감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해준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용기를 내기 어렵다. (34) 왜 사람들은 피해의식이 생기는 걸 두려워할까. 우리 사회에서 '피해의식'은 '남 탓을 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이건 과대망상이나 남 탓하기라는 문제 행동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다. 이런 덧씌우기는 피해자가 '건강한' 피해의식을 가지는 걸 방해한다. 피해의식 victim mentality 의 사전적 의미를 바탕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첫째, 피해자는 문제의 발생 원인이 아니다. 둘째, 피해자는 문제의 발생을 막을 의무가 없다. 셋째, 피해자는 권리를 침해받은 자로서 공감받을 자격이 있다. 이렇게 피해의식을 이해하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없어져야 할 것은 피해의식이 아니라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다. (61)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을 지향한다거나, 여성 인권이 아니라 보다 전체적인 인권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식의 말들이 휴머니즘과 인권을 가장 탈정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과 휴머니즘이 다르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가령 페미니즘이 휴머니즘을 재발명하고 있다는 말은 인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꾸자는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주장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과 여성인권운동이야말로 인간의 조건과 개념 자체를 질문하고 재구성하는 가장 혁명적인 휴머...

주소 이야기 -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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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빈민가는 주소보다 시급한 것이 많아 보였다. 위생 설비, 깨끗한 물, 의료 서비스는커녕 장마철 호우를 피할 지붕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소가 없어 빈민가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주소가 없으면 보통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다. 은행 계좌가 없으면 저축을 할 수 없고 대출도 받을 수 없으며 연금도 받을 수 없다. (...) 주소가 생긴 체틀라 사람들은 이제 수바시즈와 그의 팀의 도움을 받아 바로다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처음으로 개인 직불 카드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주소가 신원을 증명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39) 주소의 이점은 현실에서 거의 즉각적으로 드러났다. 먼저 도로명 덕분에 유권자 등록과 선거구 책정이 쉬워지면서 민주주의가 증진되었다. 둘째, 주소 없는 지역이 범죄의 온상이 되곤 했던 터라 도로명은 치안 강화에도 도움을 주었다. (다소 부정적인 점이 있다면 주소가 반체제 인사들을 찾는 데도 유용하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동안 수도와 전기회사들은 요금을 징수하고 설비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마다 나름의 시스템을 고안해 왔는데, 도로명 주소는 그런 업무를 훨씬 수월하게 해 주었다. 넷째, 각국 정부는 납세자들을 더 쉽게 찾고 세금을 더 쉽게 걷을 수 있게 되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도로명과 소득 사이에는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는데, 도로명 주소가 있는 지역은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소득 불평등 수준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51) 오늘날 지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역은 전 세계 70퍼센트에 달한다. 그중에는 인구가 백만이 넘는 도시도 많다. 그런 지역이 우연찮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84) 더보기... 미국에서는 필라델피아의 우체국 직원이었던 로버트 문이 우편번호(zip code)를 만들었다. (Zip은 zoning improvement plan(구획 정비 개선 계획)의 약자다.) 문이 상사에게 우편번호를 처음 제안한 때는 1944년이었는데,...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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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美 를 보는 눈'을 우리는 '안목 眼目 '이라고 한다. (12) 예술을 보는 안목은 높아야 하고, 역사를 보는 안목은 깊어야 하고, 현실정치·경제·사회를 보는 안목은 넓어야 하고, 미래를 보는 안목은 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굴지의 안목들이 버티고 있어야 역사가 올바로 잡히고, 정치가 원만히 돌아가고, 경제가 잘 굴러가고, 문화와 예술이 꽃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19) 건축의 중요한 요소를 순서대로 꼽자면 첫째는 자리앉음새 location , 둘째는 능에 맞는 규모 scale , 셋째는 모양새 design 이다. 그런데 건축을 보면서 규모와 모양새만 생각하고 이보다 더 중요한 자리앉음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물 building 만 보고 건축 architecture 은 보지 않은 셈이다. (22) 건축에서 자연과의 어울림이란 말은 얼핏 들으면 겸손하라는 뜻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겸손하지만 비굴해서는 안 되고, 당당하지만 거만해서는 안 된다는 인생의 가르침은 건축에도 그대로 통한다. (23) 작신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 作新宮室 儉而不随 華而不傍 '새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실상 이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백제의 미학이고 조선 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이 아름다운 미학은 궁궐 건축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으며,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 발전시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간직해야 할 소...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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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에서 정기 검진을 받고 돌아왔다. 그 안과는 내가 열다섯 살 때 지금의 병을 선고받은 병원이다.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내 병은 여전히 불치병이다. 세상이 이토록 바뀌고 있음에도 말이다. (21)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38) 외조부가 없는 고향은 낯선 언어로 듣는 익숙한 노래처럼 어색하고 괴기스러웠다. 외조부가 지키지 않는 고향은 더는 본향이라 할 수 없었다. 순간 깨달았다. 인간의 귀소본능이란 태어난 장소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외조부 앞에 포와 술을 올리고 무릎을 꿇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방아깨비만도 못한 외손녀는 용서를 비는 대신 열 살 계집아이로 돌아가 낮잠이 드신 외조부께 다라니경을 암송해드린다. 외조부는 찔레꽃 향기가 되어 내 손등을 도닥여주신다. (60) 진정한 복수는 모욕을 주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를 동정하는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77) 열두 살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얼른 돈을 벌어 나 때문에 팔려간 암소를 되찾고 싶었다. 우리가 소작 부치고 있던 땅도 엄마에게 사주고 싶었다. 그게 나의 꿈이었으며 성치 못한 자식의 속죄였다. 중학교 때 장래희망을 발표할 일이 있었다. 나는 확고한 신념처럼 '경리'라고 적어 냈다. 담임선생님은 내 장래희망을 보고 한심한 눈초리로 너는 어떻게 꿈도 없냐고 쏘아붙였다. 꿈이 있었기에 그리 적어 낸 것임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101) 내 몸 불편하니 어린애를 눈으로 써먹자고 낳으라니요? 어머니는 이 몸을 하고 장성한 자식 주고 싶어 김치 담그셨다면서요. 어린애 부려먹고 살라는 이야...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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뻰 봐를렌은 변월룡의 러시아식 발음이다. 변월룡은 1916년 9월 29일 러시아 연해주 쉬코톱스키구에 있는 유랑촌에서 태어났다. 유랑촌은 고려인이라 불리는 유민들이 모여 만든 임시 거주지였다. 변월룡은 가장 가난한 마을 중 하나였던 유량촌에서 태어나 궁핍한 삶을 살았다. 변월룡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나이 많은 중국 서예가를 모셔다 한문과 서예를 배우게 했다. 1926년 변월룡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있는 4년제 한인학교에 3년 늦게 입학했다.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노력해서 간호사가 된 큰누이 덕이었다.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로 전학하였다.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여섯 살부터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병행하며 1936년 졸업했다. 1년 뒤 주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7년 여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7천6백 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 서쪽 끝에 있는 스베르들롭스키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변월룡은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졸업을 앞두고 담담 교수의 권유로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에 응시해 무난히 합격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미술아카데미 1학년 때 평생의 동반자가 될 프라스코비야 제르비조바를 만났다. 1947년 6월 변월룡은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미술아카데미는 변월룡이 졸업하던 해부터 '레핀회화조각건축예술대학'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길어 '레핀미술대학'이라는 약칭을 많이 쓴다. 1947년 졸업과 동시에 레핀미술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 학업에 정진했다. 1951년 마침내 변월룡은 미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을 마친 변월룡은 건축예술부 데생과 조교수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1953년 부교수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파견을 가게 됐다. 3개월 일정이었지만, 갑자기 '평양미술대학 ...

데미안이 군대를 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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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123)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사춘기 시절에 만나 이바구했다는 기억만 있습니다. 저 구절만 남았던 《데미안》을 한 세대가 지나 다시 읽었습니다. 무언가 불가능한 걸 요구하여 굴욕을 주고 서서히 협상하게 만든 크로머를 데미안이 어떻게 제압했는지 궁금합니다. 언제나 불안했던 겁쟁이 싱클레어에게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라며 데미안은 "악마이기도 한 신 하나를 갖든지,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에 대한 예배도 만들어야 한다(126)"고 했습니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말한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압락사스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우연히 오르간 연주를 하는 피스토리우스를 만납니다. 신부가 될 뻔한 신학도였던 피스토리우스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면 압락사스가 떠난다고 알려줍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152)"이라고 말합니다. 피스토리우스와 데미안은 서로 모르는데 같은 말을 했습니다. 피스토리우스는 골동품 냄새가 났습니다. 낭만주의자이자 과거를 향한 구도자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172)"을 찾으며 싱클레어의 학창 시절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한 깨어 있음을 지향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그들의 의견, 그들의 이상과 의무들, 그들의 삶과 행복을 점점 더 긴밀하게 패거리에 묶는 것이었다. 그곳에도 노력은 있었다. 그곳에도 힘과 위대함은 있었다. 그러...

지정학의 힘 -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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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가에서 태어나 반공 의식이 철저히 내면화된 나에게 공산국가 베트남과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이 화해하고 손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분단국가 국민인 나는 상상력마저 분단됐었다. (9) 미국이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중국, 베트남과 적대적 관계에서 우호적 관계로 전환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념적 차이보다는 현실적 국익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이 중국과 다시 대립하는 이유도 전략적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바로 지정학적 접근을 한 것이다. 미국이 북한과 지금까지 국교 정상화를 주저해온 이유 역시 이념적 차이가 아니라 지정학적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어 멸망한 것도, 한반도가 분단되어 전쟁을 치른 것도, 지금까지 분단 체제가 지속되는 것도 그 배후에는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게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좌우 대결이라는 이념적 틀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오래전 국제사회에서 소멸한 이념적 틀에 갇혀 있는 한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기 어렵다. 지정학적 인식 틀이 필요하다. (12) 마한은 자신의 책에서 시파워를 결정짓는 여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지리적 위치, 천연자원 및 기후 등 물리적 환경, 영토의 크기, 인구, 국민성, 정부의 성격 등이 그것이다. (21) 매킨더는 앞으로 중심 지역·국가에게 유리하게 세력균형이 이루어진다면 유로-아시아 주변부로까지 팽창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방대한 대륙의 자원을 사용해 대규모 함대를 건조한 다음 마침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출현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주장이 1904년 논문의 핵심 메시지이다. 이것은 매킨더와 마한의 결정적 견해 차이로 매킨더는 지배적 랜드파워가 지배적 시파워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50) 하우스호퍼와 함께 지정학도 지하에 매장됐다. 지정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하우스호퍼가 나치에 긴밀히 관련했다는 점에서 지정학은 이념적으로 파산했고 도덕적으로도 ...

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 식물이 쓴 지구의 생명체를 위한 최초의 권리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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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치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단지 불쾌하고 성가신 세입자 중 하나일 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약 30만 년 전 지구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것은 38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체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생존을 위해 자신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만큼 지구 상태를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그 어려운 일에 성공한 것이다. (8) 제1조 지구는 생명체의 공동주택으로 모든 생물이 그 주권을 가진다. 탄소 함량을 기준으로 측정한 지구에 존재하는 바이오매스 550기가톤(1기가톤은 10억 톤과 같다) 중 동물은 약 2기가톤을 형성하는데 그중 절지동물은 전체의 절반인 약 1기가톤을, 어류는 0.7기가톤을 차지한다. 나머지 0.3기가톤은 포유류, 조류, 연체동물 등이 차지한다. 균류는 단독으로도 바이오매스가 동물보다 6배나 많다(12기가톤). 인간은 0.06기가톤으로 지구 바이오매스의 약 0.01퍼센트를 차지하는 반면, 식물은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450기가톤). 이로써 우리가 지구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인구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숫자로 따지면 지구의 주권은 식물의 것이어야 한다. (36) 큰 두뇌가 이점이 아니라 오히려 진화론적 약점임이 드러나면서 조기에 멸종될 수 있는 이 오만한 개체의 멸종을 막으려고, 인간국가보다 수억 년 전에 태어난 매우 현명한 식물국가가 지구상 모든 생물에게 주권을 부여한 것이다. (43) 제2조 식물국가는 자연 공동체를 구성하는 유기체 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한 사회로, 자연 공동체의 불가침권을 인정하고 보장한다. 공동체는 지구상 생명체의 기반이다. 전체 행성은 단일 생명체로 봐야 한다. 이것이 가이아 이론이다. 단일 생명체의 균형 잡힌 메커니즘은(좀더 기술적인 용어로는 항상성을 말한다) 변화하는 환경의 진동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데 필요한 힘과 대항력을 생성할 수 있다. 주변 환경의 온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도 우리 체온을 일정하게 만드는 메커니즘과 유사한 것...

이기적 인류의 공존 플랜 -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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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취약성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일자리가 불안정한 사람,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탄로 났다.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필수 노동자들"이 없으면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은행가와 변호사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지만, 식료품 상인과 간호사, 치안 인력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은 생존 문제는 물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에서도 상호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냈다. (10)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접하는 기회의 성격과 그들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물질적 조건뿐 아니라 행복, 대인관계, 인생의 전망까지 결정한다. 사회구조는 정치, 법률, 경제처럼 가정과 공동체의 생활을 조직하는 여러 제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모든 사회는 어떤 일을 사적인 영역에 두고 어떤 일을 공적인 영역에 둘지를 선택한다. 이렇게 사회제도가 작동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규범과 법규를 나는 사회계약이라고 부른다. 사회계약은 우리가 살아갈 인생의 성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계약은 너무도 중요하고, 또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다수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또한 환경이 달라지면 주기적으로 사회계약을 둘러싼 재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20) 많은 사람들이 사회계약과 복지국가의 개념을 혼동하지만, 이 두 개념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회에 무엇을 제공할 것이며, 누가 그것을 제공하는지를 규정하는 개념이 사회계약이라면, 복지국가는 사회에 그것을 제공하는 여러 가능한 수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31) 성차별 없는 노동시장을 조성하여 여성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면 여성과 남성 모두의 생산성이 향상될 것이다. 이때 우리가 경제적으로 얻...

대통령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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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흐르는 물이라면 민주주의는 물을 담는 그릇이다. '경제'는 주어진 조건에서 생산을 최대화할 때 성장한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제도를 만듦으로써 국민과 자원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끌어낸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따라 비슷한 인구와 자연조건을 가진 나라 사이에서도 경제적 성과가 크게 달라진다. 민주주의라는 그릇이 커야 국민과 자원이라는 잠재적 경제 역량을 실제 생산에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다. 민주주의 발전이 그릇의 크기를 키운다면, 민주주의 타락은 그릇에 금이 가게 만든다. 일본과 이탈리아 사례는 아무리 경제적 초강대국이라도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끝을 알 수 없는 침체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 나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5년 내내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를 제대로 비판해야 10년, 20년 후에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오랜 기간 겹겹이 쌓인 민주주의 문제를 압축해 드러냈고, 그런 만큼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하는지도 명확하게 보여줬다. (9)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은 편법으로(불법은 아니다.) 민주주의 규범을 파괴하는 사례를 분석해 그 공통점을 운동 경기에 비유했다. 타락한 민주주의는 심판을 매수하고, 상대방 동의 없이 게임 규칙을 변경하며, 경기 외부자까지 이용하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정치가 바로 이러했다. 청와대와 여당은 사법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사법기관을 집권 세력에 유리하게 만들었고(심판매수), 야당 합의 없이 선거법을 개정했으며(일방적 규칙 변경), 감염병 대유행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총선 승리를 위해 정파적으로 활용했다(외부자 이용).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이런 현상이 '합법적' 독재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75) 한국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이행하지 못한 것은 이런 엘리트의 지대 동맹을 이완하고 해체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탓이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제도는 입법과 행정에 관한 것이다. 경...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시집, 30주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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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 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박노해 노동의 새벽/박노해/느린걸음 20141210 172쪽 12,000원 인간의 삶이란, 노동이란 슬픔과 분노와 투쟁이란 오래되고 또 언제나 새로운 것 묻히면 다시 일어서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는 것 스무 살 가슴에 아픔이 없다면 스무 살 가슴에 슬픔도 분노도 없다면 그 가슴은 가슴도 아니리 스무 살 아프면 가슴이 새로 스무 살이 되어 다시 새벽 노래를 부른다 1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2 긴 노동 속에 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 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 사라져 버렸나 봐 3 민주야 저 달력의 빨간 숫자는 아빠의 휴일이 아니란다 배부르고 능력 있는 양반들의 휴일이지 곤히 잠든 민주야 4 나면서부터인가 노동자가 된 후부터인가 내 영혼은 불안하다 5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6 돈과 무력과 권력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으로 믿는 봉건적이고 독재적인 저들과 온 세상 관계가 평등과 사랑으로 일치되어야 한다고 믿는 민주적으로 단결된 우리와의 이 팽팽한 대결 7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8 아마도 내가 자살한다면 새벽일거야 9 "1980년대를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박노해는 역사이고 상징이며 신화이다. 고달픈 저임금 노동자로부터 몸을 일으켜 이 나라 최초의 빛나는 노동자 시인이 된 희귀한 존재, 사회 모순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의 고통과 꿈과 투쟁을 기적처럼 한 몸에 구현했던 투사- 문학사적으로나...

시인의 말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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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은 괜찮으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나도 오래 살고 싶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참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권에서는 끌려가는 일보다 밥을 굶어야 하는 일이 늘었다. 그게 오히려 고됐다. 단식만 도합 71일을 했으니 29일만 더 채우면 마늘도 쑥도 먹지 않고 정진한 나도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처럼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나이 들어갈수록 그게 좀체 쉽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난 곡류와 단백질만을 섭취하며 자라오지 않았다. 대다수 인류가 실현하는 끊임없는 사랑과 노동과 헌신, 그 선한 힘을 나눠 받으며 이만큼이나마 자라왔다.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함부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 모든 생명과 물질들에게 감사드린다. ···얼마 전 지구에서 가장 먼 별이 발견되었는데 129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에렌델'이라 한다. 빛의 속도로 가도 129억년이 걸린다는 머나먼 곳. 내가 나에게,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는 데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라고 믿어주면, 고맙겠다.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송경동/창비 20220422 204쪽 11,000원 부디 우리가 치워야 할 쓰레기가 당신들이 아니길 바랍니다 1 찰칵, 찰칵 소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수갑 채우는 소리로 들리는 이번 생애는 더이상 찍힐 설움도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2 그런 참혹한 애도의 시간에 어느 누군가는 달러 지수를 살피고 원유와 가스와 니켈과 밀 관련 주식을 쓸어 담지 3 인생에서 꼭 필요한 사랑의 원소들 이 추운 겨울날 저 따뜻한 햇볕처럼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지는 온정과 눈부심을 배달하는 무욕의 택배기사 4 서로 말라가는 몸을 보며 천천히 말들도 말라갔다 5 기본의 법을 뛰어넘어 새로운 법을 만들려고 싸울 때만이 비로소 노동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간명한 사실밖에 변호할 게 없었다 한다 6 그런데 누가 지금도...

자전거를 타면 앞으로 간다 - 정지된 일상을 깨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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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전거에 관한 추억 하나는 있습니다. 어느 날 "어디에나 있고 손을 뻗으면 누구나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물건"이었던 자전거가 반짝이며 지은이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자전거 출퇴근족이 됐고, 멀리 가거나 모르는 길도 자전거를 타고 쏘다녔습니다. 그러다 조금 빠른 자전거를 타고 싶은 아주 작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체력이 좋아졌는지 바퀴가 클수록 더 멀리 더 쉽게 달린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능과 가격이 어마어마한 로드바이크를 장만했습니다. 2016년에 구매해서 지금까지 타고 있습니다. 세월을 생각하면 본전은 뽑은 것 같습니다. 반려견 슈 가 자전거 바퀴에 오줌을 쌓습니다. 실내 배변은 화장실에서만 하던 천사처럼 내성적인 슈가 값비싼 자전거에 일부러 실수한 것 같습니다. 자기 대신 자전거와 밖으로 나가는 걸 질투했나 봅니다. 언니와 집을 나서던 건 자기뿐인데 듣보잡 물체가 불쑥 끼어들어 자기 자리를 차지한 걸로 보였지 싶습니다. 자전거 앞에 슈를 앉혀 놓고 한마디 한 이후로 다시는 실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기회를 노리다 적재적소에 따끔하게 불만을 표시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제 슈는 자전거를 신경쓰지 않습니다. "슈는 무심한 눈으로 '또 자전거를 타니?'라는 표정을 짓곤 제자리로 돌아가 잠을 청(87)"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며칠 여행을 다녀오면 꽤 오랜 시간 저전거 바퀴의 냄새를 맡곤 하지만(88)" 그뿐입니다. "한층 의젓해져 세상사에 초연한 듯 보이는 슈는, 이제 자전거 따위엔 심드렁한 눈빛"을 보냅니다. 참지 못하는 언니랑 성격이 너무 다른 천사 강아지가 분명합니다. 라이딩하다 맞바람을 만나면 속력을 조금 낮추면 사소한 일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 사람 사이도 그렇습니다. "잠시 속도를 늦출 때 서로가 잘못하고 있는 일들, 맞지 않는 태도 혹은 필요 이상으로 신경쓰고 있는 일들을 조율할 수 있게" 됩니다. 팀 라이딩은 ...

짱깨주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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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동아시아의 현실적 지형으로 볼 때 분단체제 해소는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체제 구축과 불가분 관계에 있다. 평화체제는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벅차고, 지금의 권력체계가 스스로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멀다. 다자주의 시대를 활용하여 지역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분단체제를 해체해야 한다. 중국은 불완전한 강대국이지만 미국이라는 기존 제국의 대항 권력이기도 하다. '중국이 문제'라는 자유주의 프레임이나 '중국도 문제'라는 이상주의 프레임에 벗어나 이 땅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중국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7) 한국 보수주의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체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드러난 것을 뜻한다. 태극기와 성조기는 그들이 구축한 전후체제의 상징이었다. '촛불혁명'의 성공, 한일 간 정보교류 협정의 무력화, 사드 설치의 실패, 북·미 간 평화협상은 한국 보수주의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사건들이었다. 중국의 부상은 그들의 체제를 가장 강력히 흔드는 진앙지였다. 박근혜정부 몰락 이후 전후체제의 유기적 위기를 실감한 한국의 보수주의는 대략 세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안보적 보수주의 세력이다. (...) 다른 하나는 경제적 보수주의이다. (...) 마지막 세력은 극우집단이다. (62) 안보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중국의 동북공정은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의 위기를 단숨에 극복해 내고 한미동맹을 지킬 수 있는 호재였다. 한국의 안보적 보수주의자들은 동북공정을 역사전쟁으로 비화시켰고, 중국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한국의 안보적 보수주의가 주도한 역사전쟁은 그들의 승리로 끝났다. 동북공정 사태 이후 중국은 미국보다도 더 위험한 '중화주의적 패권국가'로 낙인찍혔고, 추락하던 미국의 지위는 다시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우리의 영원한 우방으로 자리 잡았다. (69) 특정한 국가나 민족을 혐오하는 데는 혐오...

247의 모든 것, 당신 몸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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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 니파바이러스의 슈퍼전파자이자 인류 최후의 숙주였던 247이 죽었다. 20XX년 4월 8일 오후 1시 20분에 죽었다고 WCDC(World Centers for Disease Control, 세계질병통제센터)가 공지했다. 247은 추방에 동의하고 스스로 우주에 격리되기로 했다. 인공위성에 태워 우주로 날린 247은 유언 없이 죽었다. 누군가 247의 모든 것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모든 걸 파묻어버리는 족속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돌면 돼지를 파묻었다. 조류독감이 돌면 닭과 오리를 파묻었다. 20세기 후반 말레이시아 북부에 있는 순가이 니파라는 마을에서 기괴한 병이 돌기 시작했다. 공무원들은 돼지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흙을 뿌렸다. 감염병 학자들은 마을 이름을 따서 니파바이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이러스가 지구 곳곳으로 퍼지자 숙주로 알려진 돼지를 묻었고 더는 돼지를 사육하지 않았다. 돼지고기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열화상 카메라로 감염자를 색출하자 발열을 감추는 자들이 늘어났다. WCDC는 바이러스 보유자를 색출하기 위해 해열제를 금지 약물로 지정하려고 했다. 열이 나면 병원에 방문해서 바이러스가 없음을 확인받고 해열제를 처방받아 복용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WCDC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복병이 나타났다. WCDC 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화염병을 던졌다. 해열제를 먹을 자유, 안면인식 열화상 카메라에 얼굴을 찍히지 않을 자유를 외쳤다. 그날도 시위대가 자유를 외치며 걷고 있을 때 군중의 리더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뒤를 이어 시위대가 이유도 없이 피를 흘리며 차곡차곡 쓰러져 쌓였다. 방호복을 입은 정부 요원들이 도착해서 리더의 목과 코를 면봉으로 긁어내 문질렀지만 키트에는 아무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변종 니파바이러스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WCDC는 몸집을 키우며 모든 정부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당신 몸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됐습니다"라고 통보받는 순간 격리...

내 친구들은 왜 산으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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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 때문에 친구를 잃었다. 지인들이 페이스북에 산 사진을 올리며 사라졌다. 그들은 자연을 선택했다.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커녕 일상의 번잡함을 사랑하고, 인간과 도심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세월이 흐를수록 비슷한 사람들이 주위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걷는 사람들이 됐다. 지은이는 청년기까지 축구선수였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산으로 간 지인들과 달리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걷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의아한 것이 있다. 자연을 앞에 두고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평소에 얼마나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했으면 자연을 앞에 두었을 때 비로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유머 감각과 머리숱을 잃어버리는 시기에 등산을 시작한다. 자연에 홀린 듯 자연에 빠져드는 것을 보니, 그 근간에는 분명 내가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 번은 시도해봐야 하지 않을까. 귀찮음과 유머의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 그토록 자연에 집착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산으로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슬로 도심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산장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산에 올라갔다 와서 원시인이 된 모양이다. 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은 물론이고, 자기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허세를 내보이고 있었다. 자연은 우리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는 아무도 우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며 허세를 떨었다. 일주일 동안 시간을 보냈지만, 산은 위에서 보는 것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여전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등산가들은 산장에서 산장으로 움직이면서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로 보였다.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산으로 갔다. 부활절 휴가 직전 인 3월 말이었다. 스키를 타고 산장에 묵으며 가능한 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이 목표였다. 장비 담당자와 걱정 담당자 그리고 지난번 산행에 동행한 기록 담당자와 함께였다. 시가릴로와 술병도 챙...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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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정치적 사고'였다. 표를 준 유권자들도 그가 이토록 무지하고 무능하고 포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윤석열은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 '의도'가 아니라 '본성'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도자기가 깨지는 것은 그의 의도와 무관한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를 정치에 뛰어들게 한 동력은 사회적 위계(位階)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본능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을 속이지 않았다. 검찰총장으로서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그를 정확히 보려 하지 않았던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화장과 조명으로 윤석열의 결함을 감춰준 언론에 속은 시민도 많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7) 윤석열은 대한민국을 멍들게 했지만 뼈를 부러뜨리지는 못했다. 뼈를 부수려면 입법을 해야 하는데, 국회를 야당이 장악하고 있어서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야당이 동의하지 않는 입법은 할 수 없다. 법원은 비판적인 기자들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방통위, 방심위, 선방심위의 윤석열 추종자들이 내린 징계를 무효화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한국은 독재화 과정에 들어섰지만 독재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 시스템 덕분이다. (25) 윤석열도 비속하다.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법이 없다. 자기 객관화도 자기 성찰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과 욕망이 명하는 대로 한다. 그래서 자신의 언어가 없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위계 조직의 최고 권력자가 되면 남도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조직원 모두를 자신처럼 비속하게 만든다. 그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악인이라면 더 지독한 악을 저질렀겠지만, 어리석어서 악을 저지를 뿐이라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30) '불완전한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