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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뉴 - 에티오피아 전사들의 한국전쟁 참전기

Kagnew - The Story of the Ethiopian Fighters in Korea, 1954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은 유엔군 참전을 결정했습니다.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1950년 8월에 황실 근위대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로 파병부대를 창설했습니다. 훈련받은 파병부대 장병들이 1951년 4월 12일 황제로부터 '강뉴부대'라는 명칭과 부대기를 하사받았습니다. '강뉴(Kagnew)'는 에티오피아어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이며 또 하나는 '초전 박살'입니다. 4월 13일 강뉴부대는 지부티로 이동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1951년 5월 7일, 강뉴부대는 1만 4500킬로미터를 달려와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현지 적응훈련을 한 후 미군 제4군단 제7사단 32연대 4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전사들에게 닥친 시련은 한국의 혹독한 추위였습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찬바람은 적군보다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강뉴부대 제2진은 21일 동안의 항해 끝에 1952년 3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제1진 강뉴부대와 교대를 했습니다. 그 후 에티오피아는 1953년 4월 5일부터 1954년 7월 10일까지 제3진, 1954년 7월 10일부터 1955년 7월 9일까지 제4진을 파병했습니다. 강뉴부대 제4진은 전쟁고아가 많은 고아원을 특별히 돌봤습니다.

6.25전쟁 당시 유엔이 요구하는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한 나라는 16개국입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콜롬비아, 남아공화국 그리고 에티오피아입니다. 에티오피아는 황실근위대 6,037명을 한국전쟁에 파병했습니다. 강뉴부대(Kagnew Battalions)는 253번의 전투에서 253번 승리했고, 124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강뉴부대는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하나도 없습니다.

강뉴부대 참전용사들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1970년대 들어 경제정책 실패와 대기근으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1974년 공산화가 됐습니다. 셀라시에 황제는 폐위되고 강뉴부대 용사들은 배신자로 몰려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1991년 공산 독재정권이 붕괴하고 친서방 정권이 들어섰으나 내전 후유증과 계속된 경제정책 실패로 참전용사는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참전용사들입니다.

춘천 공지천과 아디스아바바에 강뉴부대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있습니다. 맞춤법이 바뀌기 전까지는 이디오피아라고 했습니다. 공지천엔 여전히 커피숍 이디오피아집이 있습니다. 그 앞에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이 있고, 길 건너에 참전 기념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됐으니 형편이 어려운 참전용사와 참전국가의 고마움을 잊지 말고 꾸준히 갚아야 합니다.

강뉴Kagnew - The Story of the Ethiopian Fighters in Korea, 1954/키몬 스코르딜스Kimon Skordiles/송인엽 역/오늘의책 20100625 320쪽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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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2. 강뉴부대의 숨겨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