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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구성할 권리 -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가족을 구성할 권리 -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 이 책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가족문제가 공적인 영역과 분리되는 가족 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과 연결된 사회적인 의제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 활발한 가족변동 상황은 가족구성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를 재구성하는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아직 많은 이에게 낯선 개념일 가족구성권은 말 그대로 '가족관계를 구성할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왜 중요할까? 우선, 가족구성권의 보다 상세한 정의를 보자.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구성권을 "다양한 가족의 차별 해소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로 정의한다. 이는 즉, 가족과 가족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 또한 평등하게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7)
  • 가족을 정치화하는 가족구성권은 단순히 가족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계들을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앞서 가족구성권의 정의에서 살펴보았듯 가족구성권은 근본적으로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갈래의 복합적인 차별 해소에 대한 접근을 요청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상상해오고 권장해온 ‘가족’의 의미와 가족모델은 무엇인지,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 가정되고 상상되는 이들의 모습과 어떻게 연동되어 있는지, 제도가 어떻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지 등 여러 갈래의 질문들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시민'으로서의 삶과 자격이 부여되는 데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핵심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8)
  •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퀴어, 장애인, 비혼여성, 싱글맘, 빈민 등 '이상적이지 않은 시민'들은 곧 '이상적인 가족'을 갖지 못한 이들로도 간주되며, 이들은 말 그대로 '뒤처진 존재'이자 보이지 않게 가려져야 하는 존재들로, 즉 중요하지 않은 시민으로 여겨진다. (9)
  • 이 책에서 말하는 가족구성권은 기존의 '주어진 권리'를 획득하는 차원의 개념이 아니라, 가족을 매개로 강제되어온 삶의 방식, 관계의 방식과 가족을 매개로 부여하는 '이상적인 시민'의 자격을 해체하는 개념이다. (10)
  • 가족 안에서만 삶의 자리가 존재할 때 인간의 고유성은 상실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가족을 저항의 언어로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 저항의 언어로 가족을 사유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던 존재를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리게 함으로써, 시민의 삶을 고립화하고 단절해온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을 질문하고 해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족규범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개념으로 가족구성권을 사유하는 이 책이 새로운 관계, 돌봄, 연결을 상상하고 조직하는 데 힘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13)
  • 가족구성권운동은 특정한 집단의 권리를 대변하거나 확대하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다. 국가에 의한 성과 재생산 권리 박탈, 불법화에 저항하고 마땅한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며 사회적인 기본권을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 권리로서 요구하고, 인간다운 생존 이후에 사회연대를 위한 시민들의 책무를 다시 짜는 것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구성권'의 이슈들은 여성, 장애, 이주, 성소수자, 노동, 주거, 복지, 자유권과 사회권 등 다양한 운동 영역과 이론 연구에서 포함해야 할 질문들을 담고 있는 것이다. (15)
  • 새로운 상호의존의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고립을 강제하는 사회적인 조건을 질문해야 한다. 또한 이질적이고 매끄럽지 않은 삶과 관계들이 '정상가족'의 이름으로 억압되지 않고 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토대로 논의될 수 있어야 한다. 가족변동의 한가운데에서 기꺼이 불화하는 삶들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로 자신만의 생애경로를 만들어가고 있다. (48)
  •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는 정상가족과 위기가족을 구분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이 둘은 그렇게 딱 잘라 구분될 수 없으며 그 의미가 고정적이지도 않다. '정상가족'이라는 신화는 어떤 가족이 '위기가족'인지를 지속적으로 말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제도는 그러한 가족질서의 경계를 넘는 존재들을 끊임없이 '근본 없는 존재들'로 간주하며 이들의 관계를 '위기가족'으로 낙인찍는다. 이들은 미혼모, 성소수자, 그리고 언제나 가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간주되는 장애인들이었고, 나아가 결혼하지 않는 독신여성 또한 출산을 '기피'하는 '이기적인 존재'로서 문제화되어왔다. 이러한 가족제도는 다양한 가족상황 차별과 연결되어 있으며, 사회적으로 공공성이 향하는 방향을 파악할 수 있는 기준으로 존재한다. 내내 주장하듯 가족구성권은 시민권의 영역이며, 따라서 가족구성권에 대한 논의는 시민을 구분하고 시민의 자격을 나누는 장치를 해체하는 과정이어야만 한다. (93)
  •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는 것은 혈연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살고 생을 마감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족신화를 해체한다는 것이며, 가족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삶과 죽음이 이루어짐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 이 사회의 차별 한가운데에 존재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이들이 공적으로 어떤 존재로 간주되는지, 어떻게 사회적 고립을 강제당하는지, 어떻게 중요하지 않은 삶과 관계로 규정되는지도 살펴보았다. 이러한 지점에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결코 사적인 영역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낯설고, 불온하고, 문란한 신체들이 공적 영역에 출현하고, 관계 맺고, 일상과 사회를 함께 점유할 권리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곧 불온한 정치의 현장이다. (104)
  • 가족을 저항의 언어로 삼는 것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 또한 뜨겁게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관계를 낙인의 대상이 아니라 차이를 가진 존재로서 있는 그대로 사회에 기입하는 과정이다. (152)
  • 가족형태·가족상황으로 인한 차별은 나와 타자의 경계를 공고히 하는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중심 시민모델을 넘어 상호의존의 생태계를 다시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해소될 수 있다. '그 가족'을 변태스럽게 흔들고 비트는 이들로 이 공동체가 더욱 다양하게 오염되기를, 그 속에서 우리의 일상이 보다 찬란해지기를 소망한다. (176)

가족을 구성할 권리/김순남/오월의봄 20220908 192쪽 13,800원

자살률 OECD 1위, 2023년 합계출산율 0.72명. 프랑스 팍스처럼 4인정상가족 너머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퀴어, 장애인, 비혼여성, 싱글맘, 빈민, 동거 등 '뒤쳐진 존재', '근본 없는 존재들' 혹은 '비정상가족'으로 더 오염(?)되기 전에 획기적인 상상력으로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제도를 넘어서야 한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