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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슬프고 무겁게 시작하지만 소설은 엄청 재미있습니다. 대학 시간강사인 딸 '고아리'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의 장례식에서 문상객들을 맞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천생 사회주의자였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따서 개 이름 같은 이름을 딸에게 지어줘서 고아리가 됐습니다. 실제로 정지아 작가의 이름은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은 이십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뒤 고향인 반내골에 터를 잡았습니다. 고향은 버스도 다니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구례 읍내로 나가려면 두시간을 걸어서 나가야 할 정도로 깡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새농민》을 탐독하며 '문자농사'를 지었고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간 이는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네시에 담배를 맛나게 태우고 폭우가 내리든 폭설이 내리든 자전거를 타고 신문배급소로 향했습니다. 전단지를 신문 사이에 끼워 넣는 일을 거들고 공짜 신문을 한부 얻어 와 아랫목에 자리잡고 신문을 봤습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새벽 한시에 급작스럽게 삶을 끝냈습니다.

아버지를 산림조합 장례식장에 모셨습니다. 불알친구였던 박한우 선생이 검은 양복차림으로 아침 일곱시에 첫 조문을 왔습니다. 박한우의 형은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였지만 지리산에서 죽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딸이 준 시바스 리갈 18년산을 소주 한짝과 맞바꿨던 아버지의 마지막 애인이라는 하동댁도 와서 딸이 모르는 아버지의 일상을 되새겼습니다.

아버지의 담배 친구라는 오거리슈퍼 손녀가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하고 조문을 왔습니다. 스무명 남짓 되는 아버지 동지들인 전직 빨치산들은 추모제를 삼십분 넘게 했습니다. 어머니를 끌어안고 흐느끼는 친구의 동생이자 아내의 전 시동생을 영정 속 사팔뜨기 아버지가 지켜봤습니다. 아버지가 곡성군당위원장이던 시절에 목숨을 살려주었던 순경이 와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미국과 싸워 지고 반역자가 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미국과 싸워 이긴 베트남 여인도 찾아왔습니다.

평생 군인을 하다 교련선생으로 퇴직한 조선일보 애독자인 박한우 선생은 철물점 사장, 과일가게 사장, 지물포 사장 등등 각양각색의 구례 사람들을 몇 번이고 데리고 와 딸에게 소개했습니다. 아버지 고상욱은 곡성군당위원장이었고, 서툰 농부였다가, 구례읍내 고층아파트 관리인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우파 친구들이 사라지면 좌파 친구들이 몰려와 조문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는 데 큰 도움을 준 황사장과 떡집 언니는 빨치산 후손들입니다. 큰집 길수 오빠는 육사에 합격하고도 연좌제로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평생 원수로 지내며 매일 술을 마시던 작은아버지는 장례식 마지막 날에는 종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고아리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뼛가루를 아버지가 자주 다니던 데 여기저기에 뿌렸습니다. 장례식 동안 고아리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아버지를, 늙은 아버지가 아닌 젊은 아버지를 알게 됐습니다. 한때 적이었던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살아가는 구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일상에서부터 유물론자로 산 사회주의자 고상욱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마지막까지 유머스러하게 인간의 시원(始原)이라는 먼지로 돌아갔습니다. 사램들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의 십팔번을 받아들이자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들이 곁을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창비 20220905 268쪽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