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20대의 가장 주목할 점은 다 똑같은 취준생·알바생도 아니고, 능력주의 공정 개념 세대도 아니다. 이 세대의 핵심 문제는 직업, 교육, 소득, 재산 등 여러 면에서 세대 내 양극화가 지난 10여 년간 충격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누구는 알바노동자, 누구는 대기업 취준생, 누구는 정규직 고학력자들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30대를 특정짓는 건 '영끌'이 아니라 '영끌'을 포함한 계층화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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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모든 연령대에서 다수의 시민은 경제적 격차, 계층갈등, 이념갈등 문제의 해결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에 비해 세대갈등은 청년층에서조차 한국사회 중심 문제로 인식되고 있진 않다. 뿐만 아니라 노년이든 청년이든 특정 세대만이 세대갈등 문제를 느끼고 있다고 볼 수 없고, 또한 노년이 청년들에게, 혹은 청년이 노인들에게 어떤 일반화된 세대적 적대감을 갖고 있다고 결론내릴 만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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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담론은 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이 소수 재벌이 지배하는 산업구조, 일자리 창출 없는 수출의존 축적 전략, 나쁜 일자리를 양산하는 원·하청 구조, 노동인권을 위협하는 변칙적 고용계약 형태들이라는 사실을 비껴간다. 이러한 산업·노동체제가 일하는 청년들뿐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의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을 가난하고 병들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세대론은 말하지 않는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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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세대'라는 문제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때 학자들이 민감하게 관찰했던 것이 바로 여러 세대의 공존에서 생기는 문제들과 역동성이었다. 학자들은 그것을 '비동시대적인 것들의 동시대적 공존', 또는 '동시대에 공존하는 것들의 비동시대적 성격'이라고 개념화했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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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현시대의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 나이 든 세대는 과거를 상징하고, 젊은 세대는 미래를 상징한다는 말이 맞는가? 세대교체 자체가 더 나은 미래로의 진보를 뜻하는가? 청년세대 내에는 퇴행적인 집단이 성장할 가능성은 없는가? 불행히도 만하임이 새로운 세대에 의한 새로운 시대정신의 탄생을 고대했던 1928년의 독일은 청년들이 주축이 된 나치 돌격대가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이미 황폐화시킨 상태였고, 곧이어 나치 체제가 확립되어 독일의 민주주의는 사망했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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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세대기 더 많은 힘과 영향력을 갖게 된다 해도, 그 힘을 얻은 청년세대의 주류가 반인권·반노동·반여성·반생태·반평등의 지향점을 가진 집단이라면, 그때 청년성은 역사의 퇴행을 의미할 것이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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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세대담론을 성찰해본다면, '처음으로 부모보다 자식이 가난해진 시대' 등과 같은 은유적인 담론은 '세대'를 한 명의 행위자처럼 의인화해서 마치 지금 문제가 부모와 자식 간의 불평등인 듯이 착각하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 불평등의 훨씬 더 일반적인 경우는 부자 부모 아래 부자 자식, 가난한 부모 아래 가난한 자식이라는 공식일 것이다. 세대 간 불평등을 과장하는 담론들은 바로 이 계층 간 불평등의 거대한 구조를 자꾸만 축소한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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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단일한 거대주체도, 동질적 사회집단도 아니다. 그러므로 청년세대를 '무엇'으로 고정시켜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 단 하나의 '진정한 청년' '보편적 청년'을 정의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달성될 수 없는 시도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순간, 우리는 청년의 다른 모습들을 배제하고 누락시킬 수밖에 없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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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청년이 마주한 현실에 대한 기술은 '그때는 지금과 달리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잘 되었다'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올바른 기술은 '그때는 대졸 여부에 따른 격차가 지금보다 컸고, 다수는 비대졸자였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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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마련과 부동산 자산은 세대 간의 불평등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걸친 부동산 계급 불평등의 문제이자 동시에 세대 간 부의 이전 문제인 것이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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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성세대'의 다수는 자식 세대를 위해 뭔가 양보하고 내려놓을 기득권이라는 걸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 중년 또는 노년 세대 중에 대다수는 이 사회를 더 평등하거나 불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 그 자식들이 겪고 있는 삶의 궁핍과 불안에 대해 책임을 추궁당할 때 자책하는 마음으로 고개 숙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그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 권리가 우리 사회에 있는지 묻게 된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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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정규직 일자리를 기성세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청년세대의 다수가 비정규직에 처해 있다는 담론은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는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그것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고용 격차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특별히 특정 세대가 겪는 문제처럼 말하는 순간, 거기서 배제된 다른 세대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삶의 문제들이 우리의 인식에서 지워질 것이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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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대별로 상대빈곤율의 추이를 보면 '중년의 풍요'와 '청년의 빈곤'을 대비시키는 것이 잘못된 세대론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010년대 내내 빈곤층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노인층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아래 세대들을 보아도 50대의 빈곤율이 40대 및 그 이하 연령대보다 항상 더 높았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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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의 상위계층은 그들 부모에 의한 계층재생산과 부의 이전을 통해 심지어 이전 세대의 상위계층보다 더 이른 나이에 상층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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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는 지금 외형적으로 심각한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원인이 되는 본질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아직 3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젊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첫번째 세대의 권력을 구축한 양대 정당의 기득권 집단이 아직까지 정치적 수명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산업화세대의 장기집권이냐 민주화세대의 장기집권이냐를 놓고 다투는 것은 그들끼리의 싸움이지, 오늘날 한국정치의 폐쇄적 엘리트순환구조 자체의 본질적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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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가장 큰 마이크와 스피커를 가진 집단은 비정규직 청년, 쪽방촌 청년, 구직자 청년, 중소공장 노동자 청년이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의 거대권력을 쥔 자들이다. 그리고 최근 이들은 '청년'을 소리 높여 말함으로써 기대할만한 이익이 많다는 것을 점차 이식하기 시작했다. 정치인과 정당들은 청년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청년'의 이름으로 환심을 사려고 하고, 정적을 '청년의 적'으로 만들어 대중의 분노로 상처 입게 만드는 것이 유용하다고 느끼고 있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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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위한 공정'이라는 말은 이제 기업과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학력과 저학력,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가 서로 각자의 의미를 생산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경합하는 담론투쟁, 해석투쟁, 정치투쟁의 장소가 되었다.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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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을 돌아봤을 때, 2010년대 초반부터 양적 확대가 시작된 청년담론은 처음엔 청년들의 일자리, 소득, 교육, 주거, 미래전망 등 여러 면에서 악화되고 있었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청년당사자 사회운동들과 시민사회의 대안담론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청년담론과 세대론은 점차 청년 유권자의 표를 얻고, 정권을 홍보하거나 정부정책을 정당화하고, 경쟁 정당과 정치인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갔다.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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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안토니오 그람시가 '헤게모니'라고 말했던 지배양식이 여기서 작동하고 있다. 청년들의 퇴직금을 떼먹고 인권 침해를 일삼는 것은 고용주가 아니라 기성세대라고,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하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기득권 세대 노조라고, 집값 폭등으로 떼돈을 번 것은 다주택자와 토건업체가 아니라 중년들이라고, 그들에게 분노하라고, 아니 청년들은 이미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다고 속삭이는 이 목소리들은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방식으로 강력한 매력"을 행사한다.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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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2019년에만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장관 임명이라는 1인의 이슈로 지난 30년간 '386' 담론이 처음 터져 나온 2000년 다음으로 강력한 '86세대' 담론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 인구고령화, 복지부담, 고용불안, 기후위기 등 많은 사회구조적 이슈에서 '청년세대'를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희생자로, '기성세대'를 사회문제를 만든 책임이 있거나 그 존재 자체가 사회문제인 인구집단으로 정의하는 프레임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586세대'가 악의 축으로 지목되었다. (...) 정적을 공격하는 데 등장했던 숱한 거친 언어들이 언제부턴가 '기성세대'를 공격하는 언어로 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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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집권하면 '86세대'를 '좌파'라고 공격하는 담론이 터져 나오고 보수정당이 집권하면 금세 사그라진다는 사실은, 이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와 동기, 담론의 효과에 당파적 색채가 진하게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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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세대의 언어로 말하고 인식하지 않았던 문제들, 예를 들어 민주당 비판, 진보단체의 내부 문제, 비정규직 문제, 대공장 정규직 노조 비판 등이 모두 '586세대' 문제로 정의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진보주의자들은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고, 지극히 모호한 '586' 담론의 장에 들어서게 되었고, 또 그에 상응하는 많은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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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비록 동일한 생물학적 세대위치에 있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 안에서 서로 갈등적 관계에 놓여 있고, 그 속에서 생겨난 상이한 세대단위의 흐름들이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고 있다. 그들 중에 청년세대의 다수 구성원의 삶과 영혼에 접속하고 접합할 수 있는 자들,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자들이 일찍이 칼 만하임이 이야기한 '시대정신'의 창조자가 될 것이다.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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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한국사회의 불평등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각 세대의 고통의 경중을 저울질하면서 청년들이 더 아픈지, 노인들이 더 아픈지를 따지며 세대와 세대를 비교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청년들의 어려움을 말하기 위해 다른 세대의 인생이 짊어진 무게를 폄훼하거나 심지어 기득권층으로 만들 필요는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가해자 세대와 피해자 세대, 착취하는 세대와 착취당하는 세대, 운 좋은 세대와 불운한 세대를 나누는 일은 경험적으로 사실이 아닐뿐더러 정책적으로 무익하고, 윤리적으로도 문제적이다. (350)
그런 세대는 없다/신진욱/개마고원 20220228 400쪽 20,000원
한국 사회 불평등은 세대 문제인가. 586세대는 악의 축인가. 기성세대는 과거를, 청년세대는 미래를 대변하는가.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사원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 청년과 구의역에서 사망한 김군 중 누가 청년을 대표하는가. 불평등과 불공정 문제는 세대담론인가, 세대 프레임인가.
기득권과 불평등 같은 사회문제는 세대문제라면서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세대담론은 '사이비 과학 같은 위험성'이 있다며 세대론의 가면을 벗겨낸다. 기득권, 기성세대, 586세대, 청년세대, 능력주의 같은 말들의 이면을 낱낱이 해부한다. 갈등, 오해, 분노, 대립을 부추기는 그런 세대는 없지만, 그런 세력은 있다. 세대차이는 있지만, 세대담론은 무의미하다.
덧1. 신진욱 교수의 〈
우리시대 세대〉라는 강의도 유익합니다.
덧2. 오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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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쪽 1행 〈도표 33〉 '86세대'가 '좌파'가 함께 등장한 → 〈도표 33〉 '86세대'가 '좌파'와 함께 등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