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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
뻰 봐를렌은 변월룡의 러시아식 발음이다. 변월룡은 1916년 9월 29일 러시아 연해주 쉬코톱스키구에 있는 유랑촌에서 태어났다. 유랑촌은 고려인이라 불리는 유민들이 모여 만든 임시 거주지였다. 변월룡은 가장 가난한 마을 중 하나였던 유량촌에서 태어나 궁핍한 삶을 살았다. 변월룡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할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나이 많은 중국 서예가를 모셔다 한문과 서예를 배우게 했다.

1926년 변월룡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있는 4년제 한인학교에 3년 늦게 입학했다.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노력해서 간호사가 된 큰누이 덕이었다.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로 전학하였다.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이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열여섯 살부터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병행하며 1936년 졸업했다. 1년 뒤 주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7년 여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7천6백 킬로미터 떨어진 시베리아 서쪽 끝에 있는 스베르들롭스키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변월룡은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졸업을 앞두고 담담 교수의 권유로 미술아카데미 입학시험에 응시해 무난히 합격했다. 레닌그라드에 있는 미술아카데미 1학년 때 평생의 동반자가 될 프라스코비야 제르비조바를 만났다. 1947년 6월 변월룡은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미술아카데미는 변월룡이 졸업하던 해부터 '레핀회화조각건축예술대학'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길어 '레핀미술대학'이라는 약칭을 많이 쓴다. 1947년 졸업과 동시에 레핀미술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 학업에 정진했다.

1951년 마침내 변월룡은 미술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을 마친 변월룡은 건축예술부 데생과 조교수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1953년 부교수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련 문화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파견을 가게 됐다. 3개월 일정이었지만, 갑자기 '평양미술대학 고문 겸 학장'을 맡게 됐다. 임기는 3년이었다.

평양미술대학은 이름만 미술대학일 뿐 교육 프로그램이나 커리큘럼은 부실하여 새로 만들어야 했다. 미술 교재도 전무하여 손수 만들었고, 동양화학과를 새로 개설했다. 이때 〈근원 김영준〉, 〈민촌 이기영〉, 〈원홍구 생물학 박사〉, 〈무용가 최승희〉, 〈문학가 한설야〉, 〈연극배우 박영신〉 등 여러 초상화를 그렸다.

1954년 여름, 변월룡은 이질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다. 부랴부랴 부인 제르비조바가 변월룡을 간호하기 위해 북한으로 왔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하자 아내가 돌아가자고 했다. 변월룡은 두 달 후에 돌아올 계획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레핀미술대학에 복직한 변월룡은 북한으로 가지고 갈 자료와 재료 수집을 하며 초청장이 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귀국하기 직전 북한은 변월룡에게 귀화를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초청장이 오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심증이 들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북한에서 오는 연하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1960년으로 접어들자 확 줄어들었다. 숙청으로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변월룡은 마음이 울적하면 연해주를 찾았다. 1968년에는 사할린까지 다녀왔다. 그곳에 한인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에서도 그의 이름이 희미해져 갔고, 변월룡도 북한의 상념과 정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77년, 변월룡은 정교수로 승진했다. 부교수에서 정교수로 승진하는데 24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1985년 건강 문제로 레핀미술대학을 퇴직했다. 작품 활동을 지속하다 뇌졸중으로 1990년 5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단 1년 3개월 남짓의 북한 생활을 제외하면 소련 땅에서 냉전시대만을 살았다. 살아생전에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은 영원히 밟아 보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한국근대미술사에서 1916년생들은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문학수와 정관철은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였고, 이중섭은 남한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변월룡은 소련에서 대가들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변월룡과 이중섭은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지만 문학수를 매개로 이어진다. 이중섭과 문학수는 동갑내기였지만 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이중섭이 '소' 그림으로 유명하다면 문학수는 '말' 그림으로 유명했다.

끝까지 고려인으로 남고자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았던 변월룡은 남한에서는 소련의 화가여서 알려지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영구 귀화를 거부했다고 이름이 지워졌다. 부인 제르비조바가 전시회와 관련한 만남을 거부했던 이유로 보인다. 한국인 미술학 박사 1호였던 서양화의 거장이었던 변월룡과 그의 작품은 한국근대미술사의 공백을 채워준다. 평생 조국을 그리워했던 천재화가 변월룡이라는 화가를 너무 늦게 알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문영대/컬처그라퍼 20120430 404쪽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