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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사회, 인류의 완전한 미래는 여인공화국

완전사회
유엔은 '미래로의 수면 여행'을 계획한다. 지성인이며 완전한 신체를 가진 '완전인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우선구는 전 세계에서 딱 한 명인 완전인간으로 선발된다. 남태평양에 있는 비커츠섬에 미래로의 수면 여행을 위한 보금자리가 만들어졌다. 우선구는 비커츠섬에 마련된 기밀실의 수면 장치에 누웠다. 기밀실 벽의 원자시계가 완전인간의 수면 시간을 기록하려고 움직였다.

누가 몸을 흔들었다. 우선구는 기분 좋게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우선구가 침대에 올라갈 때를 0으로 시작한 비커츠섬 원자시계는 161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선구는 161년을 자다 깨어난 것이다. 2155년. 유엔이 계획한 미래로의 수면 여행은 성공했다.

우선구가 잠들어 있는 동안 세계는 급변했다. 비커츠섬 시간으로 9년 7월 20일, 제3차세계대전이 폭발했다. 핵무기로 교전을 한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죽었고, 살아남은 지역도 방사진으로 불행한 종말을 기다리는 날들이었다. 23년 4월 14일, 원자탄 피해 복구 방식을 발견하였다. 핵폭발 지역이 속속 복구되었다.

32년. 핵무기의 대량 투입으로 시작한 제4차세계대전은 기상작전(氣象作戰)과 독기류, 독가스, 독세균 작전으로 2년 이상을 끌었다. 3차대전을 겪고 살아남은 6억 인구가 11억까지 불어났지만, 이제 9천만 명도 못 되게 살아남았다. 온 세상은 사막이 되었고 독약으로 넘쳤다. 무기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과학자들은 대오각성하고 세계과학자연맹을 만들었다.

과학자들은 곳곳에 과학센터를 만들어 전 세계 인민들을 돕고 부흥 사업을 시작했다. 과학센터가 설립된 지 2년 만에 전 인류에게 충분한 의식주 문제를 해결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자 파벌이 다시 싹트고 정치인이 등장했다. 과학자들은 모든 정치성을 외면하고 숙청을 단행하였다. 과거의 뼈아픈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과학센터가 전 세계 의식주의 생산과 관리를 쥐게 되자 스스로가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과학센터는 전 세계에 걸쳐 단 하나의 세력체를 이루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의식주가 해결되자 인민들은 향락에 빠지기 시작했다. 2036년 여성의 난자는 수정을 안 해도 특수 조건만 갖추면 인간으로 발육될 수 있다는 햄진 이론이 발표됐다. 남성 없이 여성만으로 번식할 수 있게 됐다. 2068년 칼렘 여사가 남성의 존재를 부인하고 이를 제거하자는 진성선언(眞性宣言)을 발표했다.

2095년 진성인으로만 된 칼렘 공화국이 조직되었다. 이 해를 기념하여 신기원 원년으로 삼게된다. 햄진 학설 → 칼렘 선언 → 여인국 출현으로 발전해 간다. 스톤만 사건으로 시작한 인류 최후의 대전인 성전(性戰)으로 과학센터는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쟁은 남성 진영의 참패로 끝났다. 그렇게 인민들은 모두 여성이 되었다. 왕후(王侯)문화, 웅성(雄性)문화, 양성문화를 지나 진성(眞性)문화 시대가 되었다.

진성문화 시대는 싸우지 않는 이상사회였다. 식량, 영토, 오락 등 사람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수단이 물이나 공기처럼 무제한으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양성이 대립하는 투쟁의 씨앗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칼렘주의가 인류 진화의 진리라는 설득에 지구에 존재하는 유일한 남성인 우선구는 수긍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홀랜과 께브 문제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선구가 보기엔 인간의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홀랜과 께브의 양대 세력이 정면충돌할 기세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어리석은 역사의 타성은 이제 또다시 어떤 참극을 빚어낼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세계대전은 다시 되풀이되는 것인가. 우선구는 붓을 들고 《미래 전쟁》이라는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판국에 소설이나 쓰고 있다니…


소설은 저자가 작고하기 직전까지 퇴고한 내용을 모두 반영한 최종본이다. 1960년대 문체가 내용만큼 재미있다. 당시까지도 '인민'이라는 말을 널리 썼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글이 발음표기 문자가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등장하는 물건들의 용도를 상상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SF 작가의 상상보다 훨씬 더 느리다. 다만, 세계대전에 쓰이는 무기와 그 후 전개된 상황은 썩 일리가 있다. 그래서 두렵다. 완전사회를 꿈꾸는 작가의 머리말처럼 결국 과학자나 정치가가 아닌 소설가가 세상을 구했다.

소설에서 과학자와 법조계에 엄혹한 책임을 요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집필 당시 시대가 미소 냉전시대인지라 정치에 휘둘리지 말라고 과학자에게 주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22세기 재판은 판검사와 변호사가 판결에 책임을 지지 않는 부조리를 개탄하며 지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 기자에게는 연정도 품는다. 당시 기자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지금 다시 쓰였다면 기레기와 법비(法匪)를 응징하는 얘기는 꼭 들어갔을 것이다.

《완전사회》는 1965년 〈주간한국〉의 창간 기념 추리소설 장편 공모에 당선되어 선을 보인 한국 최초의 SF 장편소설이다. 1967년 수도문화사에서 출판되었다. 1985년에 흥사단출판부에서 《여인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재간되었지만 잊혀졌다. SF 전문출판사인 〈아작〉에서 50년 만에 재출간하지 않았으면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 SF 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문윤성(1916~2000) 작가는 SF와 추리 장르 등에서 40여 편의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다. 〈아작〉 출판사는 매년 문윤성 SF 문학상을 공모하고 있다.

완전사회/문윤성/아작 20180530 480쪽 14,800원